[여론마당]이상훈/‘북-미불가침’ 北이 노리는 것

  • 입력 2003년 2월 12일 18시 3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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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사이에 핵 선제공격 금지를 포함한 불가침조약을 체결하면 미국의 핵 우려를 해소할 수 있다.”

이것은 핵개발 파문 이후 북한 외무성이 공식 발표한 일성(一聲)이다. 그렇다면 북한이 이처럼 작심하고 ‘북-미 불가침조약’에 집착하면서 노리는 것은 무엇일까.

북-미간에 불가침조약이 체결되면 첫째, 주한미군의 주둔 명분이 사라진다. 미국과 북한의 불가침조약은 양국간에 침략도 전쟁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문서로 약속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미군이 한국 땅에까지 와서 북한군과 대치하고 있을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 따라서 이런 조약이 체결된다면 북한은 새로운 명분을 들고나와 이전보다 더욱 강경하게 주한미군의 철수를 주장할 것이다.

둘째, 한미군사동맹 역시 유명무실해진다. 한미군사동맹은 제3국이 동맹국을 침략할 경우 곧 자국을 침략한 것으로 간주하고 전쟁에 자동 개입토록 되어 있다. 그런데 미국과 북한이 서로 전쟁을 하지 않기로 약속한 상황에서 북한이 한국을 침략한다면 미국은 어떻게 해야 할까. 미국이 북한과의 전쟁에 선뜻 개입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셋째, 북한은 ‘악의 축’ 오명에서 벗어나게 된다.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이 북한을 ‘악의 축’으로 지명한 데 대해 북한은 “진짜 악의 축은 미국”이라고 맞받아쳤다. 그러나 북한과 미국이 대등한 입장에서 불가침조약을 맺게 되면, 최소한 북한이 ‘악의 축’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 국민의 대북 경계심 이완이다. 통상 불가침조약을 맺으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쉽다. 따라서 미국과 북한이 불가침조약을 맺었으니 북-미간의 전쟁은 물론 한반도에서의 전쟁도 사라졌다고 방심할 것이다. 따라서 지난 5년간의 남북대화로 가뜩이나 이완된 국민의 안보경각심은 더욱 급속히 이완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그렇다면 불가침조약은 과연 전쟁을 예방하는 만병통치약인가. 1928년 세계 주요 15개국이 모든 전쟁을 불법화하고 전쟁포기를 선언했던 ‘파리조약’에도 불구하고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2차 대전 중 독일과 소련의 불가침조약(1939), 일본과 소련의 불가침조약(1941), 독일과 폴란드의 불가침조약(1934)은 모두 몇 년 지나지 않아 선전포고문으로 둔갑했다.

문제는 불가침조약이란 문서가 아니고 당사자간의 신뢰성이다. 이런 맥락에서 1994년 북-미간 제네바협약을 정면으로 무시하고 핵 개발을 계속해온 북한은 국제사회에서 불가침조약을 언급할 자격조차 없다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따라서 북한의 북-미 불가침조약 주장은 일단 미국의 위협으로부터 체제를 보존하고 장기적으로는 한미군사동맹을 흠집내면서 한반도 혁명역량을 비축하려는 술수에 불과하다.

사태가 이러함에도 정부는 북-미간의 중재자 역할을 자임하면서 애매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에 간 대통령특사마저 홀대받고 돌아온 마당에 중재자로서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이제는 정부가 우리의 분명한 입장을 밝히고 강력한 대응책을 모색해야 할 때다.

한낱 들짐승도 사냥꾼에게 혼난 골짜기에는 다시 가지 않는데 우리는 언제까지 북한의 속임수에 당하고만 있을 것인가.

이상훈 대한민국 재향군인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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