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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속 그사람]지건길/몽매한 내 정신 일깨운 ‘산사의 禪僧’

입력 2003-01-12 18:36업데이트 2009-10-11 0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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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입시를 코앞에 둔 고3 여름방학 어느 날, 나는 별러왔던 ‘출가’를 결심하고 집을 나섰다. 목적지는 경남의 ㅌ사(寺). 기차와 버스를 갈아타며 이틀 뒤 해질 녘에 도착한 산사에서 처음 뵌 분이 바로 ㅎ스님이었다. 깡마른 체구에 인자한 미소를 띠고 계셨지만 유난히 번득이는 눈매가 어린 나에게도 범상치 않은 선승(禪僧)의 위엄이 느껴졌다. 그분은 내게 ‘입산’ 동기 등 이것저것을 물은 뒤 우선 공양부터 하라며 보살을 불러 독상을 부탁한 뒤 잠자리까지 마련해 주셨다.

이튿날 아침 마당 쓸기부터 시작해 열심히 스님의 시중을 들면서 면접에 통과한 합격생 기분으로 입산 사흘째까지를 무사히 넘겼다. 그러나 스님은 그날 저녁 나를 앞에 앉히고 간곡히 설득하기 시작하셨다. 그새 얼마를 지켜보니 내 행실이 도저히 산사생활에는 맞지 않고, 나 같은 어린 학생들을 여럿 겪었지만 모두들 며칠 넘기지 못하고 떠났다며 귀가를 권유하셨다. 묵묵부답으로 나의 굳은 의지를 나타내려 했지만 스님의 설득은 그칠 줄 몰랐다. 그토록 뜻이 간절하거든 대학을 마친 뒤에도 늦지 않으니 그때 다시 찾아오라는 당부까지 곁들였다.

어쩔 수 없이 밤새 쏟아진 장대비가 그치길 기다렸다가 다음날 아침 느지막이 스님과 보살 등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산사를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그때의 참담했던 심경은 밤새 쏟아진 비로 넘칠 듯 불어난 계곡물의 광경과 함께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 기억에 선연하다.

대학에 입학한 뒤에도 스님과 한동안 편지 왕래가 있었다. 스님께서는 매번 깨알같은 글씨로 철없이 몽매한 내 정신세계를 일깨워주셨다. 언제부턴가 내 게으름 탓에 서신 왕래가 끊어졌고, 오래 전 그 절의 다른 스님으로부터 스님께서 지병으로 타계하셨다는 슬픈 소식을 들었다. 지금도 가끔 스님께서 그때 어린 나의 뜻을 받아주셨다면 오늘쯤 내가 어떤 길을 걷고 있을까 하는 생각에 잠기곤 한다.

지건길 국립중앙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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