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마당]장동만/자기 앞수표에 수취인 표기를

  • 입력 2002년 7월 19일 18시 10분


그동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른바 ‘홍3 게이트’를 유심히 지켜보던 미국의 많은 동포들이 이번에 김대중 대통령의 차남 홍업씨의 구속 기소와 관련해 발표한 검찰 수사 내용을 보고 또 한번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권 개입, 수사 무마, 인사 청탁 등 갖가지 명목으로 그가 받아 챙긴 천문학적인 돈의 액수도 놀랍거니와 그 검은 돈을 주고받는 수법이 미국에 사는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기상천외의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이 중 특히 그가 현대 측에서 받은 16억원, 삼성에서 받은 5억원의 경우를 한번 보자.

1998년 7월경 현대는 계열사 H백화점에서 손님들이 지불한 10만원권 수표 1만장으로 10억원을 홍업씨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홍업씨는 이 헌 수표들을 사람을 시켜 은행에 갖고 가서 다시 새 수표로 바꾸는 식으로 돈 세탁을 했다는 것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도 이 같은 수법으로 한솔 그룹에 50억원의 비자금을 맡겨 놓고 매달 5000만원씩 S백화점에서 손님들이 낸 수표로 바꾸어 가져다 썼다고 한다.

미국에선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이 같은일이 어떻게 해서 한국에선 가능한 것일까.

한국에서 10만원 이상 고액의 지불수단으로 흔히 쓰이는 은행 발행 자기앞수표(미국의 Bankers Check, Tellers Check 또는 Cashiers Check)에는 수취인의 이름이 명기되지 않는다.

수표를 구입할 때 구입자의 신원을 밝히게 되어 있지만 그것도 가명 차명으로 얼마라도 구입할 수 있다.

그리고 수표에 수취인 이름이 없으니 현찰과 마찬가지로 누가 누구와 주고받았는지 그 흔적이 남지 않는다.

그 증거가 남지 않으니 수사기관이 수사할 일이 있을 때 그 돈의 향방을 추적하는 데 무척 애를 먹는다.

백화점 매상대금 중 10만원짜리 헌 수표 1만장 10억원을 마련한다→10억원을 받은 홍업씨가 은행에서 새 수표로 바꾼다→아파트 베란다 창고에 감춘다. 이것이 한국식 검은 돈의 흐름이다.

만일 수표에 미국에서와 같이 수취인 이름이 명기된다면 그래도 이 같은 수법으로 검은 돈을 주고받는 일이 가능할까. 그것은 아마도 불가능하리라고 본다.

왜냐하면 그 수표는 오직 그 수표에 이름이 명기된 수취인만이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식으로 ‘○○백화점 앞’이라고 명기된 수표를 어떻게 제3자에게 줄 수 있으며 설혹 준다 해도 그들이 이를 어떻게 현금으로 바꿀 수 있겠는가.

아무리 사정(司正)의 칼을 휘둘러도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정직해라, 부정하지 말라’며 아무리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외쳐봐도 쇠귀에 경 읽기이고 공염불인 상황에서 검은 돈의 흐름을 완전히 차단하는 것까지는 몰라도 최소한 그 돈의 추적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은행의 자기앞수표에 수취인 이름을 명기하는 제도적 개선이 시급하다는 생각이다.

장동만 재미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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