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마당]오의숙/이혼, 아이의 눈빛을 본다면…

  • 입력 2002년 5월 29일 18시 21분


소아과 의사로서 어린이환자를 보고 있으면 그 어린이의 가정과 이 세상의 단면을 접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 참으로 딱하고 안타까울 때가 많다. ‘가정의 달’인 5월이 가기 전 특히 젊은 부부들과 함께 생각해보고 싶은 문제가 있다.

그 날 영은이(가명)는 친할머니와 함께 병원에 왔다. 배도 아프고 머리와 목도 아프다고 울먹였지만 진찰 결과 뚜렷한 이상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얼마 전 간호사한테서 들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아무래도 영은이 아빠 엄마에게 문제가 있는 것 같다는…. 그러고 보니 아이는 평소와 달랐다.

그러고 나서 몇 달 후 영은이는 다시 할머니 손에 이끌려 병원에 왔다. 말도 안 하고 밥도 안 먹고 시도 때도 없이 오줌을 지리는 게 주증상이었다. 아이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재잘거리던 애가 묻는 말에 대답도 않고 눈은 허공을 쳐다보는 듯했다. 주위에 누가 있는지조차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 날 할머니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영은이 부모가 이혼을 했다는 것, 영은이는 갈 데 없이 할머니 차지가 되었다는 것, 무슨 죄가 많아서 다 늦게 이런 혹덩어리를 떠맡아야 하는지 기막힌다는 것 등이었다. 세상에 태어난 지 이제 겨우 3년5개월, 어쩌다 벌써부터 이런 시련을 겪고 있을까. 필자는 아이를 안아주었다. 아이는 초점 없는 눈으로 벽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젊은 남녀가 둘이 서로 마음이 맞아 결혼을 하고 서로 좋아 아이를 낳았으면서도 이제 와서는 ‘도저히 같이 살 수 없어서’ 헤어지기로 한다는데 어른들이야 헤어지면 과거사로 돌리고 그럭저럭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가슴에 사정없이 박힌 못이 커다란 피멍울이 되어 평생을 안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꼭 염두에 두었으면 한다.

아이는 자신이 선택해서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다. 당신들이 서로 좋아 아이를 탄생시켰다면 최소한 이혼을 결정할 때만큼은 아이의 의사를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어린아이가 어떻게 의사표시를 하느냐고? 아이들은 온몸으로 말한다. 아이를 꼭 안고 얼굴을 들여다보라. 이 아이가 당신들이 헤어졌을 때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까를 상상해 보라.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이의 마음을 알 수 없다면 아이가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을 때까지 결정을 미루어라. 그리고 아이가 의사표현을 할 수 있기를 기다리는 동안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고 죽도록 좋아했을 때를 생각해 보라. 아니면 아주 힘들었을 때, 서로 위로가 되고 힘이 되어주었을 때 등을….

상대방을 이기려고 하다가 이성을 잃기 쉽다. 도저히 모두가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없다면 당신의 아이가 이길 수 있는 정답을 구하라. 당신들이 그 아이를 세상에 태어나게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조언은 아이에게서 구하라. 말 못하는 아이지만 자꾸 물어 보라. 엄마가, 아빠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말 못하는 아이도 대답을 할 것이다. 슬프디슬픈 아이의 눈빛에서 답을 발견하라.

오의숙 소아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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