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포커스]하루 관람객 1만명 이종철 민속박물관장

  • 입력 2001년 11월 22일 18시 55분


1년에 320만명. 주 1회 휴관일을 빼면 하루 평균 1만명. 엄청나게 몰릴 경우, 1시간에 3만명. 프로야구 입장객 수가 아니다. 국립민속박물관 얘기다. 1993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부터 독립한 이래 8년 만인 지난해 5월에는 2000만명을 돌파했다. 국내 문화공간 중 단연 최고다. 이제 민속박물관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는 셈. 또 관람객 중 24%가 외국인 관광객들이다. 빌 클린턴 전 미국대통령,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도 다녀갔다.

박물관이, 그것도 민속박물관이 이처럼 영예의 주인공이 되리라고는 거의 누구도 예측못했던 일.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다”고 자신해온 사람이 있다. 바로 이종철(李鐘哲·57) 국립민속박물관장이다. 1977년 미국 스미소니언 박물관에서 “한국의 민속박물관도 스미소니언의 360만명(당시 관람객)을 돌파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다짐한 지 24년 만에 이관장은 그 꿈을 이뤄냈다. 민속과 문화재에 뛰어든지 30여년 만의 일이다.

그는 지독한 일벌레, 기발한 아디이어맨, 그리고 엄청난 마당발이다. 하루 종일, 일 년 열두 달을 민속박물관만 생각하며 일하고, 관람객의 눈으로 아이디어를 찾아내고, 민속박물관을 키우기 위해 이 사람 저 사람 만나고 다닌다. 이 삼박자가 오늘의 민속박물관을 만들어냈다. 그의 박물관 운영철학과 노하우를 들어보기 위해 서울 경복궁 내 국립민속박물관을 찾았다.

20일 오후 국립민속박물관 2층 관장실. 음식문화 특별전 ‘옛 음식책이 있는 풍경’ 개막식이 끝나자 관련 인사들이 속속 관장실을 찾았다. 한 노인이 이관장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1000만원짜리 수표가 들어있었다. 박물관 발전기금이었다. 기부자는 경북 안동의 안동소주 대표인 경북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일명 인간문화재) 조옥화(趙玉花·80)옹이었다.

관장실에 모인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이관장이 농담처럼 말했다. “아니 한 1억원쯤 기부하시라니까요. 전통민속주 연구기금으로 만들어 전문 연구가도 키우시구요.” 조옹은껄걸 웃으며 “그러겠다”고 받아 넘겼다. 그 자리에 함께한 사람들 모두가 이관장 특유의 친화력과 열정의 힘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장면이었다.

-너무 욕심이 많으신 것 아닌가요?

“그래 보여요? 덴마크의 칼스버그 맥주회사는 덴마크 역사박물관을 지어 기증했습니다. 안동소주라고 못할 것 없지요. ”

사람들은 “이관장은 해내고야 말 사람이지”하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창 너머로 민속박물관 마당이 내다 보였다. 허수아비 장승 돌하르방 돌탑 솟대 등이 어수선하리 만큼 즐비했다. 박물관은 엄숙하다는 통념은 여지없이 무너져버린다. 원두막도 있고 1970년대 골목 풍경도 있다. 솜틀집 사진관 이발소 연탄가게 등등. 그 옆엔 서울 마포나루 객주(客主)도 재현되어 있다.

-박물관이 매우 역동적입니다. 민속이란 이렇게 살아 숨쉬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경복궁 다 망쳐놓았다고 욕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러나 민속박물관이야말로 궁중문화와 서민문화가 한데 어울리는 곳이라고 봅니다. 민속을 그저 돗자리 깔고 막걸리 마시며 옛날 노래 부르는 것으로 생각하면 곤란하지요. 옛스러움을 정적(靜的)인 것으로만 고수하려 하면 안됩니다. 현재 사람들이 원하는 바를 찾아다녀야지요.”

-관장님의 다양하고 기발한 아이디어 때문에 박물관의 인기가 높다고 보는 사람이 많던데요.

“저만의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박물관 직원 모두가 노력한 결과지요. 책상물림 먹물 학예사의 유아독존은 사라져야 합니다. 관람객이 원하는 것을 찾기 위해 눈 귀 코 입 혀 등 오감을 번득여야 합니다. 20세기도 우리의 민속이예요. 근대화를 이룩한 서울 구로동 벌집의 소시민, 월남전 참전자의 비애, 중동 건설의 역군 등등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거지요. 그런 것들이 바로 좋은 전시 테마입니다. 늘 사회현상을 분석해야 합니다. 쓰레기 문제가 그렇고 교과서 문제가 그렇습니다.”

이관장이 생각하는 민속박물관 기획전시의 주제는 한없이 다양하다. 초대형 지도를 바닥에 전시한 뒤 그 위에 유리판을 깔아 관람객이 직접 밟고 지나가도록 했던 ‘한국의 옛 지도전’, 건축 연장을 전시한 ‘건축 장인의 땀과 꿈’, 빠른 속도로 사라져가는 20세기 생활 문화를 복원했던 ‘20세기 회고와 21세기 전망전’, 한강의 모든 것을 들여다 본 ’한민족의 젖줄, 한강 기획전‘ 등등 화제를 뿌린 전시는 모두 이같은 발상의 전환과 적극적인 자세의 결과다. 전시 뿐만 아니라 각종 절기나 명절에 맞춘 참여 프로그램도 일년 내내 이어진다.

-그러나 전시회와 이벤트가 너무 많다 보니 내용이 부실한게 아니냐는 지적도 있습니다. 너무 행사 위주로 박물관을 이끌어 가는 것 아닙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양한 행사가 다른 박물관이나 문화기관에 파급되어 문화 재생산의 밑거름이 되고 있어요. 민속박물관이 지금의 위상을 확보한 것도 아이디어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낸 것이죠.”

-행사가 많다보니 직원들의 고생이 심할테고, 직원들을 만나보니 혹사시킨다는 불만이 많던데요.

“스미소니언 박물관이나 일본의 오사카민족학박물관과 비교해보면 인력은 3분의 1인데 일은 10배나 더 합니다. 아직도 인력 예산 유물구입비가 절대 부족한 실정이예요. 우리 직원들은 아침 8시부터 밤 10시까지 신들린 듯 일합니다. 그러나 보람있는 일이니….”

-‘신들린 듯’이라는 건 너무 과한 말씀 아닌가요.

“저는 직원들이 자신을 일찍 포기하게 합니다. 포기하고 일하게 하죠.”

그의 ‘독한’ 열정은 기획전시나 행사에 그치지 않는다. 민속박물관의 예산이나 인력을 늘리기 위해 늘 동분서주한다. 인력 예산 확보를 위해서라면 행정자치부 기획예산처에 가서 큰 절 올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마당발로 이름이 났던데 인맥 관리는 어떻게 하시나요?

“인맥 관리의 비결이라? 제게 도움을 준 분들은 결코 잊지 않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늘 감사의 뜻을 표하지요. 또 하나 더 있다면, 사람을 만날 때 상대방이 무시하지 못할 만한 사람과 함께 나갑니다. 자연인 이종철은 어떤 대접을 받아도 좋지만 민속박물관장의 품격을 위해서죠. ”

그는 말그대로 민속과 민속박물관에 모든 것을 바쳐온 사람이다. 서울대 고고인류학과를 졸업한(1966년) 그는 주전공인 고고학을 포기하고 민속학을 공부했다. 68년 문화재관리국 한국민속관에 학예연구원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한 이래 30여년 중 18년을 민속박물관에서 일해 왔다. 민속박물관장만도 두 번째(1986∼94, 1998∼현재)다.

“민속박물관장으로 두번째 부임할 때, 사람들이 모두 말리더군요. 좌천이라는 거예요. 더 좋은 자리 제안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각광받는 자리도 좋지만 음지에서 어둠을 밝히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었고, 민속박물관의 전망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이제 5년 정도 지나면 민속박물관이 한국 최고의 민속연구센터가 될 겁니다.”

‘승진하고(민속박물관장은 2급이고 국립중앙박물관장은 1급이다) 싶은 생각도 있을텐데요’라고 의중을 떠봤더니 그는 “추호도 없습니다. 전 오로지 민속박물관입니다.”이라고 펄쩍뛰었다. 그는 중앙박물관장 공채 응모와 한국전통문화학교 총장(차관급) 자리도 사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이라도 현안이 해결되면 바랑 메고 떠나 면벽수도하고 싶다”면서도 그의 욕심은 끝이 없는 듯했다. “민속박물관 이전 문제도 잘 해결하고 가능하다면 비무장지대에 200만평 정도의 통일역사문화생활관을 세우고 싶습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이관장과 어둠이 깔린 박물관 광장을 지나는데 연신 중국집 철가방 오토바이가 들락거린다. 밤10시까지 일해야하는 직원들의 저녁끼니를 배달하는 거였다. 함께 걸어나오던 한 직원이 “일상적인 풍경입죠”라고 슬쩍 말하는데 그 표정이 밝다. 학예연구직으로서의 자부심이 풀풀 묻어나는 얘기를 짐짓 귓등으로 흘리며 이관장이 덧붙였다.

“관장 자리에 있다보니 제 공부를 못하는 것이 제일 아쉬워요. 분수를 지키지 못하고, 능력도 없는 사람이 계란으로 바위치며 살아온거죠. 0.01%의 가능성만 있다고 해도 그 목표를 위해 저 자신과 동료 후배들만 혹사시켜 왔습니다.”

<만난사람〓이광표기자>kplee@donga.com

●이종철관장은

▽1944 전북 익산 출생

▽1962 전주고 졸업

▽1966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졸업

▽1968 문화재관리국 학예사

▽1975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관

▽1977 미국 스미소니언연구소 연수

▽1979 덴마크 민족학박물관 연수

▽1982 국립광주박물관 학예연구 실장

▽1986 민속박물관장

▽1994 일본 도쿄대 문화인류학 연구실 객원연구원

▽1995 국립전주박물관장

▽2001 영남대 문화인류학과에서 ‘한국 성(性) 신앙 연구’로 박 사학위

▽현재 국립민속박물관장 문화재 위원

▽저서 ‘장승’‘남녘의 벅수’‘서 낭당’‘성(性), 숭배와 금기의 문화’‘민중들이 바라본 성(性) 문학’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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