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엽교수 이미지로 보는 세상]주인공 최소화,메시지 극대화

  • 입력 2001년 10월 9일 18시 22분


외국의 요즈음 광고 한 편. 험준한 산악지대다. 바위 봉우리들이 솟구쳐 있고, 그 봉우리 중 하나에 수도원인 듯한 건물이 아슬아슬하지만 고즈넉이 자리잡고 있다. 오른편의 다른 바위 봉우리에는 정상을 정복한 암벽 등반가의 모습이 희미하게 잡힌다.

멋진 풍경이다. 여기가 어디지? 관광지 광고인가? 광고를 휙 살핀다. 그런데 광고의 어디에도 구체적 지명은 나타나 있지 않다. 다만 광고의 하단 부분에 영어로 몇 자 글자 적혀 있다. 번역하면 ‘세상 최고의 맥주’.

그렇다면 맥주 광고다. 무슨 맥주일까? 이번에는 광고의 구석구석을 뒤진다. 왼편 아래를 자세히 보니 산길을 올라오는 녹색 트럭 한 대가 나무 사이로 눈에 들어온다. 트럭의 컨테이너 옆면에 칼스버그 맥주라는 흰색 로고가 적혀있다. 비로소 이 광고의 정체를 깨닫는다. 세상 최고의 장소인 듯한 곳을 올라가는 조그만 맥주 트럭이 ‘세상 최고의 맥주’라는 광고 카피와 더불어 묘한 울림을 전달한다. 이 광고는 주인공인 맥주의 이미지를 최소화함으로써 소비자의 궁금증을 유발시켜 결국은 맥주에 대한 광고 효과를 최대화해 낸다.

16세기에 활동했던 화가 브뤼겔의 작품 한 점. 해안 지역이다. 몇 척의 범선이 눈에 띄고 저 멀리로 항구의 모습이 보인다. 육지에서는 밭을 가는 농부와 양을 치는 목동의 모습이 한가롭다. 평화로운 풍경이다. 브뤼겔의 고국이었던 네덜란드의 풍경인가? 그림의 제목을 찾는다. ‘이카로스의 추락이 있는 풍경’.

그렇다면 이 그림은 이카로스가 추락하는 모습이 담겨 있는 그림일 터이다. 이카로스는 어디 있을까?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단서를 찾기 위해 이카로스에 얽힌 그리스 신화를 되짚어 보자.

이카로스는 널리 알려졌다시피 새의 깃털을 밀랍으로 붙여 날개를 만든 후 미궁에서 탈출했다. 욕심을 내어 너무 높이 날아오르다 태양 빛에 밀랍이 녹아 결국 바다에 추락하고 말았다. 그림 속의 바다 위를 뒤져보자. 그림 오른쪽 아래편의 바다 한 쪽에 무엇인가 잠겨 있다. 자세히 보니 발바닥과 종아리가 보인다. 이카로스가 바다에 추락해 몸은 다 잠기고 발의 일부만 남았다.

이상하다. 왜 브뤼겔의 그림에서 이카로스의 모습이 최소화돼 있을까? 앞의 맥주 광고처럼 이카로스가 추락하는 모습의 효과를 최대화하기 위해서일까? 그렇지는 않다.

이카로스라는 인물이 실제로 바다에 추락했다고 할 때, 일반인들에게 그의 추락은 그리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널따란 바다에 모래알 같은 한 점으로 떨어지는 그의 추락을 일반인은 대부분 눈치조차 챌 수 없으며, 직접 목격한다고 해도 한 생명의 죽음이 안타까울 뿐이지 자신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밭을 갈고 양을 돌보며 자신들의 생업을 이어나간다.

왕족과 영웅의 역사가 아닌 일반인의 역사를 담는 데 열중했다는 것이 브뤼겔의 작품 경향에 대한 일반적 평가며, 이 그림도 그런 경향에서 예외가 아니다. ‘이카로스의 추락이 있는 풍경’에서 그는 이카로스를 최소화함으로써 영웅이 아닌 평범한 일반인이 그림의 주인공, 나아가 역사의 주인공임을 보여주고 있다.

맥주 광고는 맥주를 최소함으로써 광고 효과를 최대화했고, 이카로스에 얽힌 그림은 이카로스를 최소화함으로써 작가의 예술적 메시지를 최대화했다.

요즈음 테러를 통해, 또는 그 테러에 대한 전쟁을 통해 선전 효과나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목소리가 높다. 그러나 작지만 분명한 목적 의식을 지닌 목소리가 더 큰 효용력을 지닐 수 있음을 위의 광고와 그림은 실증해 준다.

김진엽(홍익대 예술학과 교수)jinyupk@wow.hongi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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