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추칼럼]1997 VS 2001. 그들은 지금.

  • 입력 2001년 8월 5일 17시 51분


얼마 전, 과거의 기록지들을 정리하면서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짓게 한 추억의 경기를 발견했다. 4년 전이니 그렇게 오래된 것도 아니지만, 그 당시의 까까머리 고교생들 중 상당수는 이미 프로에서 활약하고 있거나 입단을 앞두고 있고, 일부는 태평양 너머 미국에서 메이저리거에 도전하고 있다.

사람에 따라 생각이 다 틀리겠지만 1997년 고교야구 최강팀을 꼽으라면 청룡기와 봉황기, 황금사자기를 제패한 신일고를 떠올리는 사람이 가장 많을 것이다. 신일고에 못지 않은, 아니 어찌 보면 그보다 더 강한 전력을 갖고도 번번이 우승 문턱에서 주저앉은 팀이 있으니 그 팀이 바로 광주일고다. 고교야구에서 우승을 위해서는 돋보이는 에이스를 보유해야 하는 게 정상이지만, 두 팀은 투수력보다는 막강한 타선을 바탕으로 상대를 무너뜨리는 팀 칼라를 갖고 있다는 것 또한 비슷했다.

두 팀은 97년 전국무대에서 세 차례 만나 모두 접전을 펼쳤다. 첫 대결은 5월 1일 제 31회 대통령배 8강전. 이날 양팀은 무려 31개의 안타를 주고 받으며 끝까지 승부를 알 수 없는 난타전을 벌였다.

이날 양팀의 선발 라인업을 살펴보면 두 팀의 전력이 얼마나 화려했는지 알 수 있다.

* 광주일고

1번 유격수 이현곤 (연세대-기아입단예정)

2번 중견수 정재열

3번 좌익수-3루수 정성훈 (기아)

4번 1루수 최희섭 (시카고 컵스)

5번 2루수 송원국 (두산)

6번 투수-좌익수 조장현 (인하대)

7번 포수 최철원 (인하대)

8번 3루수 박재용

9번 우익수 임수현

그밖에 = 김광우(고려대-LG입단예정), 조영민(연세대)

* 신일고

1번 유격수 조재영 (LG)

2번 포수 현재윤 (성균관대-삼성입단예정)

3번 우익수 봉중근 (애틀란타 브레이브스)

4번 중견수 안치용 (연세대-LG입단예정)

5번 좌익수 김광삼 (LG-상무)

6번 2루수 남기승 (경희대-군입대)

7번 1루수 정장환

8번 투수 황상만

9번 3루수-투수 한상훈 (경희대)

그밖에 = 강서현(경남대), 박관수(탐라대),

초반은 광주일고의 페이스. 신일고에는 뚜렷한 에이스가 없었던 데다, 당시 2학년이었던 좌완투수 봉중근이 부상으로 던지지 못했던 상황을 이용해 광주일고는 착실히 득점하며 앞서 나갔다. 1회초 1사후 2번 정재열의 볼넷과 3번 정성훈의 중전안타로 만든 1사 1-2루에서 4번 최희섭의 중전안타로 1-0을 만들며 1-3루의 기회를 이어간 광주일고는 5번 송원국의 내야땅볼로 한점을 추가해 2-0으로 도망간다. 광주일고는 3회초 최희섭과 송원국의 랑데부홈런으로 2점을 더 달아나 4-0으로 앞서간다. 이때 최희섭이 쳤던 홈런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대체로 홈런타구는 지면과 45도 정도를 유지하면서 날아가다가 외야 관중석에 떨어지는 게 보통인데 이날 최희섭의 홈런타구는 보통의 홈런보다 두 배는 높이 떠서 그대로 전광판 왼쪽 모서리를 스치며 떨어지는 어마어마하게 큰 홈런이었다. 관중들 모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이제 신일이 반격할 차례. 4회말 신일은 3번 봉중근, 4번 안치용의 연속안타로 만든 무사 1-2루에서 5번 김광삼이 우전 적시타로 봉중근을 불러들이고 6번 남기승이 3점 홈런을 날려 가볍게 4-4 동점을 만들어 버린다. 광주일고의 투수 김광우는 동점 홈런을 허용한 다음 두 타자를 연속 삼진으로 잡아 위기를 넘기는가 싶었으나 9번 한상훈에게 중전안타, 1번 조재영에게 볼넷을 내줘 2사 1-2루의 위기를 만들어 준다. 여기서 투수는 1학년 조영민으로 바뀌고... 신일은 2번 현재윤과 타자일순 해 4회에만 두 번째 타석에 들어선 3번 봉중근이 연속안타를 날려 6-4로 역전에 성공하고 4번 안치용의 2루타로 7-4까지 도망간다. 1학년생 조영민으로 신일타선을 막기는 무리라고 본 허세환 감독이 다시 김광우를 마운드에 올려 5번 김광삼을 유격수 플라이로 잡아내고 나서야 긴긴 4회말이 끝난다.

곧바로 이어진 5회초, 이번에는 광주일고 쪽의 세찬 파도가 몰아친다. 3번 정성훈부터 7번 최철원까지 5타자가 연속안타를 몰아치며 순식간에 4점을 뽑아내 스코어는 8-7로 다시 역전. 관중석은 술렁이고 벤치의 양 팀 감독은 천당과 지옥을 몇 번씩 오가는 중이다.

광주일고는 7회 상대 실책을 이용해 한 점, 8회 3번 정성훈의 솔로홈런으로 또 한 점을 추가해 10-7로 달아났지만 아직 안심하기에는 이른 상황이었다.

9회초 광주일고의 공격. 선두 7번 최철원의 볼넷과 8번 김광우의 희생번트로 만든 1사 2루의 기회, 9번 조영민의 우전 적시타로 소중한 추가점을 뽑아 11-7을 만든 광주일고는 곧이어 터진 1번 이현곤의 좌중월 2점 홈런으로 13-7을 만들며 사실상 승부를 결정짓는다.

9회말 신일의 공격. 1번 조재영이 우전안타, 2번 현재윤이 볼넷으로 무사 1-2루를 만들자 관중석은 술렁이기 시작한다. 4회말에 7점을 뽑았던 신일이고 보니 역전하지 말라는 법도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3번 봉중근이 우익수 플라이로 물러나 상승세를 이어가지 못하고... 4번 안치용과 5번 김광삼의 연속 2루타로 3점을 추격해 보지만 큰 점수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13-10으로 광주일고가 승리를 거두게 된다.

광주일고와의 첫판을 아쉽게 패한 신일은 봉황기 2회전에서 광주일고와 다시 만나 6-5로 이겨 일단 설욕에 성공한다. 하지만 이 때는 양팀의 주전 선수들이 캐나다 세계청소년대회 출전관계로 빠져 진정한 승부라고 볼 수 없었던 면이 있긴 하다.

봉황기는 강서현이라는 비교적 무명이었던 선수를 MVP로 탄생시키는 이변(?)을 낳게 되는데, 이는 청소년대표 차출과 봉중근이 본격적으로 투수를 하기 시작하면서 생긴 결과였다. 청룡기 때만 해도 봉중근이 마운드에 오를 때에만 우익수로 출장하던 강서현은, 봉황기에서 봉중근과 안치용이 청소년대표로 발탁되자 모처럼 주전으로 뛰게 되었고, 결국 대회 최다타점상과 함께 최우수선수까지 받게 되었다. 그 당시 주변 사람들하고 "후보가 MVP를 타니 도대체 신일은 얼마나 강한 팀이냐"고 하던 얘기가 생각난다.

어찌됐건간에 1승 1패로 맞선 두 팀. 51회 황금사자기 결승전에서 피할 수 없는 마지막 대결을 벌이게 된다. 대체로 큰 경기에 명승부 없다고 하지만 이 경기... 정말 엄청나게 재미있었다.

초반 기선을 잡은 쪽은 신일. 신일은 1회말 공격에서 2사후 3번 봉중근의 2루타와 4번 안치용의 고의4구로 만든 2사 1-2루에서 5번 김광삼이 3점 홈런을 날려 가볍게 3-0으로 앞서간다. 봉중근과 안치용에게 승부를 걸지 못하고 주자를 모아주면 김광삼이 싹쓸이 하는 이런 식의 득점은 당시 신일 경기에서는 흔한 패턴이었다.

광주일고도 질 세라 곧바로 이어진 2회초 2사후에 8번 임수현의 2루타와 9번 최철원의 볼넷으로 만든 2사 1-2루에서 이현곤의 쓰리런 홈런으로 동점을 만들었다. 완전 장군에 멍군인 셈. 광주일고는 4회초에 9번 조영민의 안타와 1번 이현곤의 2루타로 만든 무사 2-3루 기회에서 2번 정재열의 번트안타와 3번 정성훈의 스퀴즈, 5번 송원국의 땅볼 타구 때 상대 3루수의 실책으로 대거 3점을 뽑아 6-3으로 역전을 시켜 놓는다.

신일의 반격도 만만치 않아 5회말 2번 현재윤과 3번 봉중근의 연속안타로 6-4로 추격한 뒤 8회말 봉중근의 솔로홈런으로 6-5 턱밑까지 따라붙고 안타로 나간 안치용과 남기승을 강서현이 2루타로 모두 불러들여 기어코 7-6으로 경기를 뒤집고야 말았다.

이대로 경기가 끝났으면 이 게임이 결코 명승부로 오랫동안 기억되지 않았을 것이다. 저력의 광주일고는 9회초에 대반격을 개시한다. 선두 정성훈이 극적인 동점홈런을 날려 기사회생하게 된 것이다. 신바람이 난 광주일고는 최희섭의 2루타와 송원국의 안타로 무사 1-3루의 찬스를 이어가며 신일고의 목에 비수를 들이대는데... 조장현의 내야 플라이로 아웃카운트만 하나 늘어나자 조급해진 허세환 감독은 김광우에게 스퀴즈 번트를 지시하지만 번트 실패와 함께 최희섭이 태그 아웃되면서 결국 추가득점을 하지 못한 채 찜찜한 느낌을 가지고 9회말 수비에 나서게 된다.

도망갈 기회에서 상대를 뿌리치지 못해 뒷덜미가 서늘했던 광주일고. 1사후 2번 현재윤에게 2루타를 맞으며 불길한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한다. 3번 봉중근 볼넷, 4번 안치용도 볼넷. 1사 만루에 타석에는 1회 3점 홈런을 때렸던 김광삼. 정면승부 밖에는 방법이 없는 그런 상황에서 김광삼이 때린 볼은 좌익수 머리 위를 넘기며 땅에 떨어져 8-7 케네디 스코어로 신일고가 우승을 차지했다.

97년 막강한 전력으로 3관왕의 위업을 달성한 신일고. 그리고 신일고와 3차례 맞서 모두 명승부를 펼쳤던 광주일고의 선수들. 앞서도 말했듯 이들 중 일부는 이미 프로선수로, 또 프로입단을 앞두고 있는 대학선수로 뛰고 있고, 일부는 야구를 그만둔 선수들도 있다. 지금 97년 광주일고 4번을 치던 최희섭의 이름을 모르는 야구팬은 없지만 5번을 치던 송원국은 '만루홈런 한방' 이전까지는 두산팬들에게도 생소한 선수였다. 불과 4년 사이에 이들 사이에는 너무나 많은 변화가 생긴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아직 22살에 불과한 젊디 젊은 나이이다. 앞으로 4년 후에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게 될까?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자료제공: 후추닷컴

http://www.hooc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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