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추칼럼]'후회...후회...후회...'

  • 입력 2001년 7월 7일 15시 09분


후추가 태어난 지 2년이 가까워지고 있지만 단 한번도 큰 후회를 해 본적은 없었다. 욕심만큼 후추를 꾸려가기에는 환경적인 제약이 있었지만, 최대한으로 짱구를 굴려서 최선을 다 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제 필자는 난생 처음으로 후추와 관련된 일로 인해 가장 큰 후회를 했다. 밤에 잠이 잘 오지 않을 정도로 화가 나고 내 자신이 미워졌다. '왜 그랬을까...? 내가 미쳤지...'

어제 정봉수 감독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지병인 심부전증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셨다고 했다. 정봉수... 후추 명예의 전당을 처음 기획할 때 필자가 목 터져라 외쳐댔던 이름이 바로 정봉수 감독이었다. 그가 떠났다. 이젠 그의 '증언'을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가슴을 치고 후회를 해 본들 이젠 아무 소용이 없게 되었다. 왜 좀 더 집요하고 좀 더 집착하지 못 했을까...

지난 2년 동안 명전 인물 선정 회의를 할 때마다 필자의 입에선 같은 소리가 나왔다. "정봉수 감독 그 양반 언제 돌아가실 지 아무도 모른다... 빨리 해야 한다..." 99년 가을에 후추가 그를 접촉했을 때에는 '코오롱 팀 이탈 파문'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언론 매체와는 결별을 선언하셔서 후추와의 인터뷰가 성사되지 못 했고, 몇 달 전 그를 접촉했을 때에는 '건강상 이유'로 모든 인터뷰를 사양하셨다. 그리곤 몇 달이 흘렀고 그는 그렇게 가 버리셨다. 할 말이 진정으로 많은 분일 거라고 믿고 있었는데... 결국은 후추가 좀 더 악착 같이 물고 늘어져서 인터뷰를 성사 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말 없이' 눈을 감으시고 말았다.

92년 여름밤… 동해안에서 여름 휴가를 마치고 새벽녘에 집에 도착해서 TV를 켠 순간 '몬주익의 기적'은 이미 마지막 피치를 올리기 시작하고 있었고, 그 순간 이후부터 한국의 마라톤은 영원히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생전 듣도 보도 못 했던 '까까머리 마라토너' 황영조가 국민적 영웅이 되었고, 정봉수란 이름 석자 역시 '83년 멕시코 영웅-박종환'이란 이름만큼 찬사를 받았다.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마라톤 지도상에 코리아란 반도가 그려졌던 것이었다.

황영조가 빠진... '앙꼬 빠진 찐빵'이라고 생각하던 96년 애틀란타 올림픽에선, 이봉주란 이름이 황영조를 대신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황영조는 마라톤을 떠났지만 정봉수는 건재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99년... 황영조와 이봉주를 키워낸 '한국 마라톤의 대부 정봉수'라는 사람은 하루 아침에 선수들의 프라이버시와 재원까지 침범하는 파렴치한 인간으로 둔갑하게 되었다. 철저한 무명 시절에도 들을 수 없었던 '혐의'를 한국 마라톤 최고의 조련사 정봉수가 받게 되었던 것이었다.

이봉주가 시드니에서 넘어졌을 때 필자는 정봉수를 떠 올렸다. '이봉주-부진'이란 기사를 읽으면서 그 순간 정봉수 감독은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 궁금했다. 물론 이봉주는 재기에 성공했지만 그를 키워낸 정봉수가 재기하기엔 이미 너무나 많은 세월과 상처가 그를 스쳐갔다.

빈소를 찾은 황영조와 이봉주... 정봉수 감독이 만들어낸 역대 최고의 작품들과의 재회에는 정봉수의 목숨이 담보 잡혀야만 했다. 어쩌면 이 시대 최고의 스포츠 비극 중에 하나 일런지도 모른다. 어쩌면 정봉수는 진짜 선수들의 사생활을 차단하고 수입을 갈취했으며, 소문 대로 코오롱 소속 팀 주무와 내연의 관계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정봉수의 몰락은 이봉주를 영입하기 위한 이미 치밀하게 계산된 음모일런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의 산산 조각난 명예를 회복 시키는 일은 불가능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욱이 그에게 물어야 할 질문들이 너무도 많았다. 그를 둘러싼 수많은 의혹을 풀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필자는 이렇게 그의 입을 틀어 막은 채 쓸쓸히 떠나 보내야만 한다. 입이 열이라도 할말이 없다.

혹자는 말한다. 정봉수 감독은 말년이 좋지 않았다고... 정봉수 감독의 말년이 어떻고 소문이 어떻고 필자는 아무 상관이 없다. 정봉수 감독은 이 땅의 척박한 마라톤 황무지에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벼를 거두었던... 그 점 하나 만큼은 정봉수가 쇠고랑을 차는 일이 있었더라도 영원한 '불변 사항'이다. 황영조를 통해서 그리고 이봉주를 통해서 비추어진 정봉수의 인생엔 '승자(winner)'라는 단어만이 적합할 뿐이다. '영광의 순간'은 마라토너들의 몫이었지만 '기적 뒤의 번뇌와 고통'은 정봉수의 몫이었다. 저 세상에서도 정봉수 감독은 '1초를 더 깎아 내리기' 위해 고민할 것을 필자는 안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그리고 감사한다.

자료제공: 후추닷컴

http://www.hooc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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