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리포트/요즘 가장들은-상]"아버지는 외롭다"

  • 입력 2001년 5월 24일 18시 27분


《요즘 가장들은 외롭다. 가정에서의 위치가 옛날 같지 않다. 피곤한 직장의 하루를 보내고 가정에 돌아가면 왠지 낯설어 ‘손님 같다’는 느낌을 갖는 경우가 있다고 호소하는 사람도 있다. 가장이 바깥 생활에 열중하고 있는 동안 가정에는 아내와 자녀들을 중심으로 나름대로 ‘울타리’가 쳐져 있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가정의 달’을 보내면서 요즘 가장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 가정의 오늘을 살펴본다.》

▼글싣는 순서▼
- <상>"아버지는 외롭다"
- <하>"남편 권위 이젠 옛말"

대기업 계열사 부장인 최모씨(43)가 요즘 집에서 갖는 유일한 낙은 두어달 전부터 기르기 시작한 강아지 ‘누룩이’와 노는 것이다. 접대와 업무 때문에 일주일에 사나흘은 밤 12시가 돼야 귀가하는 그를 반겨주는 유일한 집안 식구다. 잠든 아내와 아이들이 깰까 봐 도둑고양이처럼 집안에 들어서면 누룩이는 그 시간까지도 기다렸다는 듯 안긴다.

“아내는 고교 1학년생 딸의 공부를 뒷바라지하다 그 방에서 함께 자지요. 며칠 전 누룩이를 안고 잠들었다가 아침에 깬 후 내 처지가 한심스러워 씁쓸했어요.”

최씨는 어쩌다 일찍 퇴근하는 날, 집안 분위기가 오히려 썰렁해지는 것을 느낀다.

학원에서 밤 10시나 되어서야 돌아오는 딸과 아들(중2)을 기다리며 아내와 함께하는 유일한 일은 텔레비전 시청. 아이들과 집안 이야기를 제외하고는 공통된 화제가 없어진 지 오래인 이들 부부에겐 차라리 침묵이 편하다. 아이들도 집에 오면 각자 자기방에 들어가 나오지 않는다.

15년간의 샐러리맨 생활을 청산하고 5년 전 컴퓨터 장비 납품업체를 창업한 김모씨(48)는 요즘 가끔 밤 열차를 탄다. 밤 11시 서울 청량리역을 출발해 강원 태백을 지나 철암역에 내리면 이튿날 오전 3시반. 목적지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밤 열차를 타고 어두운 차창을 바라보며 있노라면 마음이 좀 가라앉는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터질지 몰라 외줄타기하는 것이 소규모 사업가예요. 그렇다고 걱정하는 낯이라도 보이면 아내와 아이들은 나보다 더 걱정을 합니다. 7명의 직원들도 때로는 적(敵)으로 느껴져요. 수익이 났으니 빨리 빨리 월급 올려 달라고 아우성이잖아요.”

요즘 가장들은 외롭다. 특히 40, 50대에 접어든 중년 가장들은 고도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했으면서도 구조조정 바람과 디지털 문화에 재빨리 적응하지 못해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크다. 그렇다고 귀가하면 편안해지는 것도 아니다. 아내와 자녀들이 그들 나름대로의 질서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가장은 외톨이가 되기 십상이다. 한창 공부시킬 나이의 자녀를 둔 이 또래 가장들은 섣불리 인생의 탈출구도 찾지 못한다. 형해화(形骸化)한 ‘가장으로서의 부양의무’밖에 남은 것이 없다고 허탈해 하기도 한다.

요즘 텔레비전 드라마에도 등장해 화제를 모은 중년 남성들의 일탈도 이런 남자들의 외로움과도 연관된다는 지적이 있다.

중소기업 부장인 K씨는 얼마 전 고교 동창회에 갔다가 친구들이 털어놓는 가정내 위상에 관한 이야기가 너무 비슷해 놀랐다.

K씨는 “훌륭한 직장을 갖고 있어 남들이 부러워하는 친구들 역시 가정에서는 소외감을 느낀다는 비슷비슷한 경험이 이날의 주제였다”며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여자를 사귄다는 친구도 많았다”고 전했다.

96년 문을 연 시민단체 ‘아버지의 전화’(대표 정송·鄭松·02-2208-0660)에는 경제난이 닥친 97년 이전까지도 하루 5∼10통에 불과했던 아버지들의 상담전화가 요즘 하루 30여통에 달한다. 정 대표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자녀 교육 상담이 대부분이었으나 98년 말 들어서는 실직문제가 1위로 뛰어오르더니 최근에는 ‘외로움’과 ‘아내 자식들과의 불화’를 호소하는 아버지들이 부쩍 늘었다”고 전한다.

<현기득·박민혁기자>rati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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