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프리즘]김미현/‘호모 텔레포니쿠스’

  • 입력 2001년 5월 8일 18시 43분


‘외로운 여자들은/결코 울리지 않는 전화통이 울리길 기다린다./그보다 더 외로운 여자들은/결코 울리지 않던 전화통이/갑자기 울릴 때 자지러질 듯 놀란다./그보다 더 외로운 여자들은/결코 울리지 않던 전화통이 갑자기 울릴까봐,/그리고 그 순간에 자기 심장이 멈출까봐 두려워한다./그보다 더 외로운 여자들은/지상의 모든 애인들이/한꺼번에 전화할 때/잠든 체하고 있거나 잠들어 있다.’(최승자의 시 ‘외로운 여자들은’)

전화선이 세상과 유일하게 연결된 탯줄처럼 느껴지던 때가 있었다. 기다리는 전화가 올까봐 외출도 못했고, 다른 통화는 되도록 짧게 끝냈으며, 몇 번 울리다가 끊어지는 전화는 모두 기다리던 전화처럼 생각되었던, 그래서 전화기가 마치 ‘흉기’처럼 무서웠던 시간 말이다.

▼전화도 골라서 받는 시대▼

하지만 이제는 그 어떤 핑계나 착각도 가능하지 않다. 오지 않은 전화는 그냥 오지 않은 전화일 뿐이다. 걸려 온 전화를 확인하지 못할 확률은 뒤로 넘어져서 코가 깨질 확률 만큼 낮으니까. 발신자의 전화번호가 수신자의 전화기에 나타나는 ‘발신자 번호표시 서비스’가 5월부터 유료로 제공되고 있기 때문이다. 걸려온 전화는 즉시 그 발신자가 확인이 되고, 못받은 전화의 번호도 남겨지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전화에 관한 한 더 이상 두려움과 떨림, 망설임이 사라졌다. 그저 발신자의 ‘신원’을 ‘조회’한 후 받거나 받지 않으면 그만이다.

전화를 받아도 싱겁기는 마찬가지다. 누구인 줄 알고 전화를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허무 개그’ 버전도 나왔다.

때리리리리링

철수:순이, 오랜만이네?

순이:어, 그래.

물론 발신자가 확인되면 음란 전화나 장난 전화가 줄어들 수도 있지만 불량한 전화를 걸 사람은 반드시 걸고야 만다. 공중전화기나 남의 전화기는 여전히 익명성이 보장되는 치외법권 지대이다.

더구나 *→23번→#를 누른 다음에 전화를 걸면 발신자의 번호가 확인되지 않는다.

발신자의 번호 추적을 따돌리는 방법도 늘어나는 것이다. 정조대를 채우면 정조가 더 잘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정조대를 여는 열쇠가 더 성행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나 할까.

그렇다면 정작 발신자 번호표시 서비스 때문에 피해를 보는 것은 보통 사람들일 수 있다.

그들은 인기있는 연예인이나 스토킹의 대상이 아니어서 귀찮은 전화보다는 기다리는 전화가 더 많다. 대개는 112나 119에 전화 걸 일이 없기를 바라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제는 헤어진 애인의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그냥’ 전화를 걸 수도 없다. 번호를 잘못 알았거나 잘못 눌러도 상습범이라는 누명을 쓴다.

무엇보다도 물건처럼 ‘골라서’ 받는 전화는 대인관계를 ‘편식’에 빠지게 한다. 원하는 사람하고만 연결되면 관계 자체가 편협해지고, 불편한 관계에 대한 면역성이나 인내심은 줄어든다. 남에게 피해를 받기는 싫어하면서 자신은 남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

동물학자인 최재천의 말처럼 ‘알면 사랑한다’. 모르니까 미워하는 것이다. 알기 위해서는 싫어도 만나봐야 한다. 만나려면 받기 싫은 전화도 받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전화에 관한 한 우리는 율리시즈가 아니라 오르페우스여야 하지 않을까.

율리시즈는 사이렌의 유혹을 뿌리치기 위해 귀를 막고 몸을 묶었다. 반면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를 보고 싶은 유혹을 이기지 못해 뒤를 돌아보았다. 차단과 거부의 결과인 율리시즈의 성공적 귀환보다 모험과 위험을 무릅쓴 오르페우스의 슬픈 방황이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해준다. 만나지 않는 사람보다는 힘들게 만나는 사람이 만남을 만남답게 만드는 법이다.

▼대인관계 '편식증' 걸릴 수도▼

‘호모 텔레포니쿠스’(전화하는 인간)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로 전화와의 ‘접속’은 늘었다. 하지만 인간과의 ‘접촉’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앞으로 발신자 번호표시 서비스가 상용화되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더욱 더 꿋꿋하게 믿어야 한다. 받기 싫은 전화를 받지 않겠다는 마음에서가 아니라 걸려 온 전화를 한 통이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마음에서 사람들은 발신자의 정체가 궁금한 것이라고. 그렇게 믿고 싶을 정도로 우리는 외로운 존재들이니까.

김미현(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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