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보 기자의 반집&한집]겁없는 신예 도발에 서9단 참패

  • 입력 2001년 3월 14일 18시 49분


◇서봉수-안영길 왕위전 대국◇

◇흑 실수에 서9단 너무 욕심, 좌상변 대마 잡혀 불계패◇

“아니, 이렇게 치받는 수도 있나?”

12일 서봉수 9단(백)과 안영길 4단의 왕위전 본선 대국을 보던 검토실 기사들이 장면 1도의 백 2를 보더니 깜짝 놀라며 웅성댄다.

“초반부터 대단한 신경전인데.”

서 9단과 안 4단이 1승을 거둔 뒤 맞이한 대국. 이 판을 이기면 선두권으로 올라설 수 있기 때문인지 두 사람의 기세가 충돌하고 있었다.

먼저 변화구를 던진 것은 안 4단. 장면 1도의 정석 과정에서 2의 곳 대신 흑 1로 붙여 서 9단의 심기를 건드린다.

서 9단은 초반부터 장고를 거듭한다. 신예의 겁없는 도발을 혼내주고 싶다는 기분이었을까. 무려 40분을 생각한 끝에 백 2를 찍듯이 내려놓는다.

이어 백 4로 끊어 치열한 백병전 양상. 검토실은 ‘백 2가 신수지만 썩 좋은 결과를 기대하긴 힘들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백이 장면 2도의 1, 2를 교환하고 3으로 뛴 것 까지는 최선의 수순. 안 4단은 가벼운 마음으로 흑 4로 붙였다. 그러나 선수라는 생각에 무심코 둔 4는 대악수.

흑은 4에 두지말고 그냥 A로 나온 뒤 백이 B로 둘 때 C로 젖혔으면 유리했다. 하지만 흑 4와 백 ‘가’가 교환된 뒤 흑 A로 나오면 백 D로 막아 백이 유리하다.

서 9단의 얼굴엔 슬그머니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불리한 전투에서 횡재의 기회가 온 것. ‘가’로 잇는 게 가장 간단하지만 좀 더 챙기자는 욕심이 생긴다. 백 5로 치받았다. ‘가’로 이어 두는 것보다 이득. 하지만 안 4단은 즉각 흑 6의 맥점을 터뜨린다.

서 9단은 섬뜩 놀란다. 전혀 머리 속에 없던 수. 작은 이득에 집착한 백 5가 가져온 결과는 참혹했다. 이후 좌상변 백이 모두 숨지며 60집이 넘는 흑의 큰 집이 만들어졌다. 111수만에 흑 불계승.

suhchoi@donga.com

◇안영길 4단 누구?◇

◇97년 입단 떠오르는 별…이세돌도 꺾어◇

참 곱상한 청년이다. 얼굴엔 솜털이 보송보송하고 목소리도 나긋나긋하고 키도 164㎝로 아담한 사이즈다. 안영길 4단(21).

그가 왕위전에서 파란을 일으키고 있다. 안 4단은 이세돌 3단과 서봉수 9단을 물리치고 2승으로 단독 선두를 달리고 있다.

“두 판 다 운으로 이겼어요. 세돌이와는 공식 대국에서 처음 만난 건데 리그전이니까 한판 져도 괜찮다는 자세로 뒀는데 엎치락 뒤치락하다가 이겼어요. 서 사범님도 초반에 착각하시는 바람에….”

겸손한 말과는 달리 그는 새롭게 떠오르는 신예로 주목받고 있다.

지난해 48승 13패(승률 78.69%)로 다승 6위, 승률 5위. 왕위전 외에 LG정유배와 KBS 바둑왕전 본선에도 올랐다. 이세돌 3단의 화려한 비상이 없었다면 당연히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을 것이다.

안 4단은 97년 입단 이후 98년 29승15패, 99년 35승 16패로 갈수록 성적이 좋아지고 있다.

“초단, 2단 시절엔 꼭 이겨야한다는 생각에 죽자고 바둑 공부만 했어요. 그러나 성적은 기대에 못미쳤어요. 그런데 지난해 대학(명지대 바둑학과) 들어가서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여가도 즐기고 하면서 바둑 보는 시야가 넓어진 것 같아요. 바둑 공부시간은 하루 평균 4시간 정도로 줄였는데 성적은 더 좋아졌어요.”

득도까진 아니더라도 바둑세계가 한꺼풀 벗겨진 것은 분명하다. 정대상 8단은 “무채색 같은 기풍이지만 일본의 왕리청(王立誠) 9단처럼 두터움과 실리가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평한다.

안 4단은 조급하지 않다. 이창호 9단을 넘기엔 아직 멀고 험한 길이 있음을 잘 알고 있다. 마흔살이 넘어 전성기를 구가하는 왕 9단처럼 그도 대기만성의 전형을 보여줄지 기대된다.

<서정보기자>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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