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희연의 스타이야기]복사꽃보다 붉은, 르네 젤위거

  • 입력 2001년 3월 6일 16시 53분


"오! 제가 스타라니요. 믿을 수 없어요. 전 그냥 스타를 흠모하는 사람이라구요."

믿을 수 없긴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크지 않은 눈과 반쯤 내밀어진 입술, 실리콘을 넣지 않은 가슴으로 할리우드 스타가 될 수 있는 여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믿을 수 없는 사건을 만들어버린 그녀는 어딜 보나 스타답지 않았지만 그러기에 오히려 더 사랑스러운 여자다. 타락한 세상에 던져져 있으면서도 섣부른 치기 대신 덜 여문 순진함으로 세상을 녹여낼 것 같은 여자. 르네 젤위거는 "끔찍한 사건을 만나도 복사꽃보다 붉은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기만 할 것 같은" 그런 얼굴을 지녔다.

인디 영화에 묻혀있던 그녀를 건져 올린 <제리 맥과이어>의 카메론 크로 감독은 르네의 얼굴에서 독특한 표정을 읽었다. "울 때 웃는 표정이 배어 나오고 웃을 때 우는 표정이 배어 나오는 얼굴"이라니. 그 오묘함에 넋이 나간 그는 "그녀가 빌리 와일더 스타일의 히로인"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카메론 크로 감독을 만난 후 세상은 달라졌다. 솔직히 그녀는 <제리 맥과이어>의 오디션을 받을 때까지만 해도 이런 심정이었다. "톰 크루즈와 스크린 테스트를 받다니. 이 정도면 자손 대대로 전해질 얘깃거리가 될 수 있겠구나."

촌스러운 신데렐라는 단지 후대에 남길 얘깃거리를 위해 감격했지만,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카메론 크로 감독이 전화를 걸어 "우리 영화에 출연해달라"고 정중히 부탁한 것이다. "오! 제가 정말 그 역을 맡아도 되나요?"

믿을 수 없는 사건이 터진 후 그녀는 하루에도 열두 번씩 자신의 뺨을 꼬집어봤다. 신데렐라의 꿈이 깨지지 않길 기도하며. 생각해보면 <제리 맥과이어>의 도로시도 자신과 더할 나위 없이 비슷한 처지의 여자였다. 실수투성이에 뭐 하나 제대로 갖춰진 게 없는 불완전한 캐릭터. 얼떨결에 매력적인 한 남자를 제 것으로 챙긴 도로시처럼 그녀 역시 이 영화 이후 뭇 남성들의 '사랑스러운 그녀'가 됐다.

짝사랑이 잘 어울릴 것 같은 그녀는 2001년에도 여전히 멀리 있는 남자에게 심장을 내준다. <너스 베티>의 베티. 사는 게 팍팍한 그녀에게 한 줌 빛으로 다가온 남자는 아쉽게도 이 세상에 없는, 드라마 속의 캐릭터다. TV 드라마 <사랑하는 이유>의 매력적인 의사에게 사랑을 느낀 베티는 이것이 환상인 줄도 모른 채 그 남자에게 삶의 모든 희망을 내건다. 솔직히 좀 덜 떨어진 여자가 아니냐고 욕할 만한 캐릭터지만 르네가 창조해낸 베티는 풋풋한 생기로 한껏 달아올라 있다. 그녀는 영화 속 상황과 마찬가지로 "스타를 사랑하는 그 모습 자체로 스타가 될 수 있는 비법"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녀는 스타가 된 지금도 스타에 대한 흠모를 버리지 못했다. "전 광적인 팬이 되는 게 어떤 건지 알고 있어요. 그건 아주 행복하면서도 고통스러운 일이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 체조선수 나디아 코마네치와 올가 코버트, 육상선수 윌마 루돌프의 광적인 팬이었고 비틀즈 멤버였던 폴 메카트니의 열성 팬인 적도 있었어요."

반면 그녀는 남의 눈에 띄는 방법이 뭔지를 잘 몰랐다. 어린 시절 그녀의 옆집에 살았던 친구 리 페인은 "여덟 가구가 모여 사는 조그마한 마을이었는데도 자신은 정말 그녀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스위스 엔지니어였던 아버지와 네덜란드 간호원이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는 어린 시절을 텍사스주 케이티에서 조용히 보냈다. 형제는 오빠 앤드류와 르네 딱 두 사람. 별로 튀진 않았지만 고등학교 시절 치어 리더로 활동했고 홈커밍 데이 퀸에 노미네이트된 경험이 있는 그녀는 자연스럽게 연기와 가까워졌다.

연기에 먼저 눈을 뜬 건 오빠 앤드류였다. 앤드류는 어린 동생에게 "함께 드라마 스쿨에 가입하자"고 졸랐고 그녀는 흔쾌히 "그렇게 하자"고 했다. 이 학교에서 연기를 지도했던 레이첼 스미스는 훗날 그녀에 대해 이렇게 회상한다. "몇 번의 쇼를 함께 했는데 르네는 그때도 연기력이 다른 사람보다 훨씬 뛰어났어요. 그래서인지 그녀의 성공은 내게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니에요."

텍사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그녀는 졸업 후 몇 편의 TV 드라마를 거쳐 곧 인디영화계로 스며들었다. 그녀의 초창기 영화는 <텍사스 전기톱 살인 사건 4>. 전기톱을 든 살인자 뒤에서 "끼악" 소리를 지르며 도망 다녔던 여자, 이 비참한 희생자가 바로 르네 젤위거다. 이 영화 이후 출연한 <청춘 스케치>와 <엠파이어 레코드>에선 위노나 라이더와 리브 타일러의 청순한 매력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지만, 행운은 비교적 빨리 찾아왔다.

선댄스영화제에서 우연히 학교 선생님과 작가의 미적지근하지만 질긴 사랑을 담은 <이 넓은 세상>을 보게 된 카메론 크로 감독이 그녀에게 바로 정신을 빼앗겨 버린 것이다. 크로 감독의 전격 캐스팅으로 <제리 맥과이어>의 여주인공이 된 그녀는 정신을 잃을 만큼 어지러운 상승기류를 탔다. 인디 영화에 출연했을 땐 일주일이면 다 떨어졌던 개런티가 수북히 쌓여갔고 팀 로스(페이탈 서스펙트), 메릴 스트립(원 트루 씽), 짐 캐리(미 마이셀프 앤드 아이린) 등 기라성 같은 스타와의 공연이 줄을 이었다.

이중 가장 잊을 수 없는 작품은 뭐니뭐니 해도 짐 캐리와 공연한 <미, 마이셀프 앤드 아이린>이다. 이 영화에서 이중 분열된 남자의 푼수 애인을 연기한 그녀는 함께 출연한 짐 캐리의 마음까지 훔쳐내는 데 성공했다. 짐 캐리는 촬영 내내 그녀의 뒤를 강아지처럼 따라 다녔으며 다이아몬드 반지를 선물하는 등 온갖 애정공세를 퍼부었다. 물론 이들의 사랑은 오래가지 못한 채 금세 어긋나버렸지만 말이다.

사랑에 익숙하지 못한, 그저 멀리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데만 익숙한 그녀에게 솔직히 <너스 베티>는 너무 쉬웠다. 직접 환상을 머금고 사는 사람들의 심리 상태 및 사례를 연구하지 않았더라도 그녀는 베티라는 여자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미국 대중문화가 만들어낸 허구의 이상형에게 마음을 빼앗긴 간호사 베티의 사랑과 모험 이야기 <너스 베티>. 르네 젤위거를 위해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 영화는 아마도 그녀에게 평생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을 듯하다. 몽롱한 그녀의 눈빛은 세상의 모든 때를 씻어주는 세정제처럼 깨끗했고, 그 눈빛에 넋이 나간 사람은 비단 남자만이 아니었으므로. 그녀는 여성에게 질투심을 유발하지 않으면서도 남자의 보호본능을 자극할 수 있는 기묘한 매력의 스타다.

황희연<동아닷컴 기자>benotb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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