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보기자의 반집&한집]돌부처 '수읽기 기계' 녹슬고 있나

  • 입력 2001년 2월 7일 18시 39분


서봉수 9단은 이창호 9단을 일컬어 ‘기계(機械)’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인간이라면 실수가 있는 법인데 기계처럼 한치의 오차도 없이 최선의 수읽기를 해내는 이 9단에 대한 경외심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최근 이 9단의 기계가 녹슬고 있는 것일까.

2일 열린 국수전 도전자 결정 3번기 마지막 대국. 1대 1 동률에서 맞붙은 조훈현 9단과 이 9단은 국수전 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는 듯 초반부터 장고에 장고를 거듭했다. 오전 10시에 시작한 대국이 오후 6시가 다 되도록 100수 언저리에서 맴돌고 있었다.

초반엔 흑을 든 조 9단이 절대 유리했으나 좌변 흑진 속에 갇힌 백을 아무 대가없이 살려주는 바람에 형세는 팽팽한 균형. 검토실에선 “이정도 미세해진 바둑이라면 이 9단이 놓칠 리 없다”며 농담섞인 말들이 오갔다.

조 9단도 이대로 끝내기로 가면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것일까. 장면도 백 ○를 잡자며 스르렁 칼을 뽑았다. ‘흑 대마를 잡지 않으면 진다’는 조 9단의 각오가 대국실에 가득했다.

[장면도]

백 1로 두었으면 도전권은 이창호 9단의 차지였다. 흑은 두 점을 살리기 위해 단수치고 이을 수밖에 없는데 결국 중앙에서 패가 난다. 그러나 백은 우하귀에서도 패를 만드는 수가 있어 백 ○는 ‘양패’로 살아간다.

검토실의 한 기사는 “아마 상대가 이창호가 아니라면 조 9단도 이렇게 심하게 두진 않을거요”라며 웃었다.

바둑이 클라이맥스를 향해 치달았다. 두 대국자 모두 마지막 1분 초읽기까지 몰렸다. 흑의 대마 사냥이 막다른 골목까지 다다랐다.

하지만 검토실에선 ‘흑의 무리’라며 이 9단의 승리를 예견하고 있었다. 사력을 다해 공격하고 있는 흑의 포위망이 너무 허술하다는 것.

그러나 장면도에 이르렀을 때, 이 9단의 기계가 갑자기 삐걱댄다. 이 9단이 백 1로 붙여 쉽게 사는 수를 놓치고 무심결에 ‘가’로 단수친 것. 검토실에 있던 윤성현 안조영 6단은 동시에 “어, 이게 뭐야”하며 외마디를 지른다. 백 1로 뒀으면 백 ‘나’가 절대 선수인 점을 감안할 때 백 ○가 안전하게 살 수 있었다.

이 9단이라면, 아니 아마 4, 5단 수준이면 한눈에 볼 수 있는 수읽기. 국후검토 때 이 장면부터 검토가 시작됐다. 이 9단은 “착각했다”고 한마디한 뒤 멋쩍게 웃을 뿐이었다.

‘테니스 심취설’이나 ‘연애설’이 과장된 것이라면 기계의 정밀도가 떨어진 것은 아닐까.

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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