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희연의 스타이야기]기린을 닮은 여자, 장만옥

입력 2000-10-23 10:16수정 2009-09-21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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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의 그녀는 화려했고, 90년대의 그녀는 더 이상 오를 자리가 없을 만큼 모든 걸 다 가졌다. 1966년 9월20일 홍콩에서 태어난 이 범상치 않은 소녀는 어릴 때부터 긴 목과 바람처럼 흩날리는 팔, 다리를 가지고 있었고, 가녀린 목에 얹혀진 얼굴에선 매번 사려 깊은 여성의 표정과 장난꾸러기 소년의 표정이 함께 흘러나왔다.

소녀가 자라 17살이 되었을 때 홍콩인들은 자연스레 그녀를 '홍콩 최고의 미인' 자리에 앉혀놓았다. 미스 홍콩이 된 그녀가 택한 길은 알려져 있다시피 영화배우다. 여배우 장만옥. 1984년 <청와왕자>로 데뷔해 여태껏 약 6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고, 다양한 홍콩 영화상과 각종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휩쓸었던 그녀. 그런데도 그녀는 과거의 화려했던 자신보다 현재의 자신을 더 좋아한다고 말한다.

'여성의 가장 아름다운 한때'라는 제목의 영화에 출연한 탓에 요즘 그녀는 이런 질문을 많이 받는다. "당신에게 가장 아름다운 한때는 언제인가?" 그러면 그녀는 곧 "바로 지금이죠"라고 답한다.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아름다운 한 때가 되도록 노력하며 살아요. 1980년 9월21일에 난 가장 행복했어요, 라고 말하는 건 좀 우습고 슬픈 일 아닌가요.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며 살아야죠."

현재를 소중히 가꿀 줄 아는 여자는 나이를 거꾸로 먹는다. 그녀는 정말 그랬다. 장만옥의 목은 여전히 길고 가냘팠으며, 하늘하늘한 몸짓에선 성스러운 기운마저 흘러 넘쳤다. <화양연화> 속의 그녀는 오래 전 <폴리스 스토리>에서 보았던 생기발랄함도, <첨밀밀>에서 보았던 애틋한 소녀적 감수성도 갖추지 못했지만, 여전히 아름답다.

차이니스 드레스를 곱게 차려입고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를 곱게 울리며 걸어가는 여자 리첸. 사는 게 힘겨워 보이는 그녀는 성장한 드레스 안에 곧 바스러질지도 모를 가녀린 몸을 숨긴 채 삶을 인내한다. 남편의 불륜을 모른 척 하고 대신 남편의 애인이 버려 둔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 장만옥은 <화양연화>의 리첸에 대해 "34세의 내가 바로 지금, 꼭 해야만 하는 역할이었다"고 고백한다.

<화양연화>를 연출한 왕가위 감독 역시 "시나리오를 쓰기 전부터 이미 리첸 역에 장만옥을 염두에 뒀다"고 말했다. <화양연화>의 리첸은 장만옥을 위해 만들어진 맞춤 캐릭터라는 뜻이다. 프랑스 작가주의 감독이자 장만옥의 남편인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은 이런 왕가위 감독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영화 속 아내의 연기에 내심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내 아내기 때문이 아니라 감독의 입장에서 봤을 때 그녀는 정말 대단한 연기자다. 작은 움직임 하나로 그녀는 리첸의 감정을 세심히 표출해냈다. 그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연기가 아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장만옥은 왕가위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웠다. 희고 연약해 보이는 얼굴로 소화(유덕화)의 가슴에 불을 지른 <열혈남아>의 아화, 아비(장국영)와의 완결될 수 없는 사랑 때문에 외로워하는 <아비정전>의 수리진,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어하지만 끝내 듣지 못하는 <동사서독>의 자애인 등, 왕가위 영화 속 그녀는 언제나 외로운 기린처럼 고혹적이다.

그러나 그녀는 <열혈남아>부터 <화양연화>까지, 무려 네 편의 영화에서 함께 작업한 왕가위 감독을 좋아하면서도 내심 미워했다. "촬영이 임박했는데 왕가위 감독은 내게 스토리나 캐릭터조차 자세히 설명해주지 않았다. 어떤 장면이냐고 물어도 묵묵부답. 무려 3주를 기다려 단 이틀간 촬영한 적도 있었다. 이 영화를 촬영하는 덴 15개월이라는 무지막지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완성된 영화를 보고 나니 힘들었던 일, 미웠던 사람이 모두 잊혀진다. 왕가위 감독과 난 아무래도 애증관계인 것 같다."

그녀가 60여 편의 출연작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관금붕 감독의 <완령옥>이다. 1930년대 상해 최고의 여배우 완령옥에 관한 전기 영화이자 다큐멘터리적 기록인 <완령옥>에 대해 그녀는 훗날 "더 이상 좋은 연기를 보여줄 수 없을 정도로 최선을 다한 영화"라고 말했다. 게다가 그녀는 이 영화로 베를린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으며, 여배우라는 직업에 대해 다시 돌아볼 시간도 가졌다.

이 영화를 찍은 후 부쩍 성숙해진 장만옥은 "이제 연기가 더 이상 직업이 아니라 생활"이라고 말한다. 그녀가 영화를 찍는 이유는 완벽한 예술작품을 향한 도전이라는 뜻이다. 장만옥에게 영화는 삶의 필수품이다. 그녀는 국내 영화전문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배우로서 뿐만 아니라 관객으로서도, 영화가 없었다면 세상이 끝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을 거"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덧붙인 말이 또 의외다. 영화를 하지 않았다면,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되었을 거라나.

그녀는 정말 요즘 새로운 꿈에 푹 빠져 산다. 선 하나 하나가 모여 완성되는 그림의 매력에 흠뻑 취해버린 그녀는 "조만간 그림을 한 번 배우고 싶다"는 소망을 살포시 내비쳤다.

하지만 이것은 언제 이루어질 지 모르는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그녀는 올 11월부터 후 샤오시엔 감독의 신작에 출연할 예정이며, 2002년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게이샤의 추억>에서 고혹적인 일본 기생을 연기할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더 원숙해지는 배우 장만옥. 그녀는 여태껏 한 번도 슬럼프를 거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 같다. 장만옥은 항상 '현재'를 아름답게 가꿀 줄 아는 매력적인 '동양의 진주'기 때문이다.

황희연 <동아닷컴 기자> benotb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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