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속으로]최윤 '느낌'/여자가 육감에 빠졌을때…

  • 입력 2000년 6월 9일 19시 03분


어느 순간, 아주 사소한 육체적 감각이나 느낌이 급작스럽게 우리의 생을 뒤흔들며 존재의 전환을 가져올 수도 있지 않을까. 때로 삶이란 논리적으로 포착되지 않는 무수한 우연과 충동적인 욕망, 미묘한 느낌들의 연쇄고리인지도 모른다. 그 우연과 욕망과 느낌에 대해서 우리 인간들은 속수무책으로 노출되어 있다. 그러한 풍경들을 형상화하는 것 역시 소설의 중요한 역할일 것이다. 소설이 무엇보다도 ‘인간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바로 그러한 인간 육체의 미묘한 느낌과 섬세한 내면 심리를 정교하게 묘사할 수 있는 매체가 다름 아닌 소설이기 때문이리라.

▼삶은 우연-충동-느낌의 연속▼

최윤의 신작단편 ‘느낌’(동서문학 여름호)은 한 마디로 인간의 육체적 감각이 얼마나 섬세하고 민감한 것인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소설이다.

여기 감각과 느낌에 무척이나 예민한 여자가 있다. 그녀는 사무실에서 자신을 도와주는 한 남자사원과의 사소한 신체적 접촉 때마다, 이를테면 사무적인 일 때문에 남자의 손이 그녀의 손에 닿을 때마다 이상한 파장의 느낌을 가지게 된다. 그러한 느낌은 ‘당장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일종의 한 감각, 그것은 약 오 초 간, 놀라운 속도로 그녀의 온몸을 돌고 난 후 그녀의 몸 안에 갇혀버렸다’는 표현을 얻는다. 그 기묘한 감각은 이후 그녀의 일상을 강력하게 지배하게 된다. 이를테면 그녀는 그 느낌과 감각을 다시 느끼기 위해서, 일부러 그 남자와의 접촉을 시도하게 되며, 혼자 있는 경우라도 그 느낌을 다시 상상하며 애초의 황홀했던 감각의 복원을 시도하게 되는 것이다.

▼사회적 지위-도덕성도 부차적▼

그 과정을 작가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그녀는 밤이 되기를 기다리면서 다시 한번 문제의 느낌을 불러내 본다. 그것은 잘 입력된 프로그램처럼 그녀의 부름에 순순히 되살아온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몸은 건드리기만 하면 울리는 악기라도 되는 것처럼 그 감각의 재생을 극적으로 연장할 줄도 안다.’ 애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남자와의 사소한 신체적 접촉으로 인해 생성된 미묘한 육체적 느낌을 스스로 즐기며, 그 느낌의 정체를 분석하고자 욕망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일상적인 도덕이나 상식의 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육체의 진실을 섬뜩하게 전달하고 있다. 그 자극적이며 매혹적인 ‘감각의 미궁’에 홀린 여자에게 사회적 지평이나 도덕적 당위의 세계는 부차적인 관심의 대상일 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그녀가 즐겨보던 저녁 뉴스를 그냥 지나치거나 남자친구의 방문을 일부러 따돌리는 장면은 바로 감각의 미궁에 갇혀버린 자의 표정을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 ‘그녀는 처음으로 남자친구의 목소리가 자신의 취향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본다’는 대목은 이제 감각의 재생에 모든 관심을 투여하고 있는 주인공의 몰입 상태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점차 감각은 그녀의 일상을 잠식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며, 종국에는 ‘그녀에게 손과, 손이 유발한 느낌은 거의 종교적인 수준에 다다른다’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감각의 물신화로 나아가게 된다.

▼황홀한 시간은 오래갈 수 없어▼

최윤의 ‘느낌’은 우연한 계기에 의해 사소한 육체적 감각에 지배당하게 되는 주인공의 내면 심리를 절묘하게 묘파하고 있는 수작이다. 그러나 결말 부분에서 진행되는, 주인공이 자신을 강렬히 지배했던 느낌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과정에 대한 묘사가 너무 소략한 것이 아닐까? ‘한순간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기에 그녀는 정확히 얼마간이나 이 느낌이 지속되었는지도 알 수 없을 정도다’라는 표현으로 정리되기에는 주인공을 지배했던 그 미묘한 감각이 너무나 선명하고 매혹적인 것이 아니었던가. 아, 여기까지 말하니 이해가 된다. 참으로 황홀한 느낌은 결코 지속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 그것은 한 순간에 사라지는 연기와도 같은 것이니까.

권성우(동덕여대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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