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중구 칼럼]YS의 침묵

  • 입력 1997년 10월 18일 07시 57분


「김대중비자금」파문 열흘이 지나도록 김영삼(金泳三·YS)대통령은 굳게 입을 다물고 있다. 나라안이 온통 대란(大亂)상태인데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김대통령은 16일 아침에도 청와대 모수석비서관을 인터폰으로 불러 『쓸 데 없는 말을 삼가라』고 함구령을 내렸다고 한다. 청와대쪽에서 간헐적으로 흘러나오는 얘기를 종합하면 김대통령으로서는 지금 침묵밖에 달리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사안이 워낙 민감한지라 섣불리 무슨 말을 꺼냈다가는 자칫 어느 한쪽을 편드는 꼴이 되고 그럴 경우 새로운 정쟁(정쟁)의 빌미가 될 것이 뻔한 이상 차라리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상책이라는 이야기다. 말하자면 침묵의 정치를 하고 있는 셈이지만 김대통령의 성격이나 정치스타일로 보면 이런 긴 침묵은 이변에 가깝다. 김대통령의 입다물기는 이번 비자금폭로를 누가 주도했느냐는 수수께끼와 연결되면서 더욱 궁금증을 자아낸다. 국민회의 김대중(金大中·DJ)총재와 신한국당 이회창(李會昌)총재를 한꺼번에 제거하기 위한 김대통령의 「새판짜기」 작품설로부터 김대통령―이총재 DJ죽이기 합작설, 이총재 단독결행설이 그럴듯하게 나돌아 그 어느 쪽이 진짜인지 가려내기란 구름잡기보다 더 힘들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총재의 단독결행설이 더 설득력을 얻어가는 추세다. ▼ 「비자금 정국」억측 무성 ▼ 외형상의 침묵과는 달리 내막적으로 어떤 교감이나 은밀한 움직임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1차 폭로때는 몰라도 2차 폭로때부터 청와대에 사전 사후보고가 없었음은 확실하다고 청와대 관계자들은 말한다. 이총재 청와대방문 거절도 그렇지만 김대통령의 92년 대선자금문제를 두고 『법앞에 평등하다』고 말한 이총재의 강성 발언을 보더라도 사후묵인설은 모르겠으나 최소한 사전합작설로 보기는 무리라는 것이다. 침묵의 배경을 표정읽기에서 찾는 사람들도 있다. 여야가 극한대결로 치닫는 심각한 국면이라면 대통령의 얼굴은 어두워야 상식에 맞다. 그러나 최근 TV에 비친 김대통령의 표정은 그리 어둡지가 않다. 청와대를 다녀온 사람들도 대통령이 의외로 밝은 표정이었다고 말한다. 물론 표정관리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런 가설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번 파문으로 DJ 역시 대선자금의 원죄(原罪)에 묶이는 신세가 된 것만은 확실하다. 설령 DJ가 대통령이 된다 해도 자신의 92년 대선자금을 문제삼기는 어려울 것이고 그렇다면 최소한 퇴임 후 안전은 보장된다고 믿기 때문이 아니냐는 분석이다. ▼ 私心없이 할말은 해야 ▼ 대통령의 침묵을 긍정적으로 보려는 시각도 있다. 이번 대선에서 엄정중립을 지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사실 퇴임 4개월을 앞두고 김대통령의 영향력은 급속도로 감소하면서 품고 있는 희망 자체도 엄청나게 줄어들었을 것이다. 더이상 무엇에 연연하기보다 대선 하나만이라도 공정하게 관리함으로써 역사에 기록되자고 마음먹었을 수도 있다. 침묵의 정체가 이런 것이라면 그것대로 의미가 있다. 침묵도 하나의 의사표시일 수는 있다. 그러나 나라가 이토록 흔들리고 있는데 대통령이 가타부타 한마디 말이 없다는 것은 상식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굳이 누구 편을 든다기보다 국정의 최고책임자로서 판단은 있을 것이다.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가려 사심(私心)없이 말할 것은 말하고 짚을 것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 그것이 대통령 본연의 책무다. 대통령은 신한국당이나 국민회의만 보고 정치하는 자리가 아니다. 중립에도 소극적 중립과 적극적 중립이 있다. 당장은 검찰이 엄정하게 정치적 중립을 지키도록 하는 것이겠으나 공정한 대선관리 결의가 확고하다면 그 또한 국민앞에 분명히 밝히고 다시 한번 공개적으로 약속할 필요가 있다. 남중구(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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