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의 컬처플러스]내 얘기 같은 드라마 '화려한 시절'

  • 입력 2002년 2월 3일 17시 23분


아우에게

진눈깨비 흩날린다. 네가 있는 통영 앞바다에도 눈송이 푸르게 스러지는지 궁금하구나.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형제와 떨어지는 것이고, 가끔씩 전화하는 것이고, 또 정말 큰 결심으로 이렇게 편지쓰는 것임을 오늘에야 알겠다. 명색이 글쟁이인 형이지만 엽서 한 장 띄운 적이 없구나.

너도 SBS 주말드라마 ‘화려한 시절’을 즐겨본다는 소식을 들었다. 홀어머니와 두 아들의 이야기. 드라마의 줄거리를 접하는 순간, 이것이 곧 우리들의 이야기란 걸 알아차렸단다.

시대가 다르고 장소가 틀리더라도, 아비없이 살아가야만 하는, 무너진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만 하는, 형을 위해 아우가 양보하고 손해를 보아야만 하는 날들을 어찌 잊을 수 있겠니.

이제는 직장도 얻고 결혼도 해서 삶의 기반을 닦았지만, 내 인생의 황금기는 너와 함께 뒹굴던 그 시절인 것 같다. ‘화려한 시절’이라는 드라마 제목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더구나. 이때 ‘화려함’은 물질적 풍요와는 거리가 멀겠지. 차가운 냉방에서 서로의 체온에 의지해 겨울을 나더라도, 노력하고 또 노력하던 열정이 곧 화려함의 본질일 테니까.

지난 주부터는 민주(박선영)를 사이에 두고 석진(지성)과 철진(류승범)의 갈등이 부각되기 시작하더구나. 형제란 무엇일까.

평소에는 누구보다도 가까운 혈육이지만, 부모의 사랑에서부터 재물이나 명예의 상속권을 따질 때는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기도 하겠지. 양녕대군이나 효령대군처럼 아우인 충녕대군에게 스스로 권력을 양보하는 경우는 드문 일이고, 대부분은 왕자의 난처럼 갈등을 빚기 마련이다.

가족을 위해 민주를 포기하라는 철진의 요구가 귀에 쟁쟁거리는구나. 난 철진의 마음을 이해할 것 같다. 돌이켜 보면 너도 늘 내게 양보만 했다. 대학 다닐 학비가 부족해서 나보다 먼저 입대를 했고, 또 집안의 잔심부름과 궂은 일은 너의 몫이었지. 형이 출세하기 위해서라면 이깟 일 아무것도 아니라고, 형을 믿고 따르는 철진의 밝은 웃음, 그건 너의 웃음이었다.

석진의 절망 역시 짐작할 수 있다. 사실 장남인 그가 믿고 의지한 이는 어머니도 아니고 시집 간 누이도 아니고, 자신을 속속들이 아는 동생이니까. 말 잘 듣던 동생이 눈물 그렁그렁한 눈으로, 태어나서 처음 형의 뜻을 꺾으려 든다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닌 것이다.

형제의 다툼은 가슴 아픈 결과를 낳기도 하지. 어떤 형제는 의절을 하고 어떤 형제는 서로를 고소하여 법정에 서기도 하더구나. 사랑이 깊은 만큼 배신감도 크기 때문일까.

우리에게도 그런 고비가 있었다. 멱살을 잡고 서로의 삶을 비난하던 순간들. 다툼에서 화해로 이어지는 길이 결코 쉽고 간단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가족이 꿈꾸는 ‘희망’을 의심하지 않았기에 무사히 고비를 넘긴 것 같다. 지금 서로를 잡아먹을 듯 싸우는 석진과 철진도 마찬가지겠지. 두부장사로 가족의 생계를 잇는 할머니와 어머니의 고단한 걸음걸이를 살핀다면, 소용돌이는 있겠으나 파산에까지는 이르지 않으리라 믿는다.

그때 마을 버스 정류장에 우두커니 서 있던 바보 식이와 흥부상점 아저씨의 탁한 웃음을 기억하니. ‘화려한 시절’의 작가 노희경씨는 바로 그 순진하고 순박한 우리네 이웃을 이 드라마에서 되살려 놓고 있구나. 가끔 험한 소리도 나고 치고 받으며 싸우는 일도 있지만, 그들 중 정말 악한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인간에 대한 깊은 사랑과 따스한 연민. 이것이 노희경 선생의 가장 큰 장점이리라.

드라마를 보면서 내내 불편했던 부분은 석진이 따뜻한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동안 철진이 추운 이태원 거리에서 구두를 닦거나 대패로 각목을 미는 장면이었단다. 너 역시 저랬을까. 애꿎은 진눈깨비와 주말드라마를 끌어들인 것도 35년만에 고개 숙여 사과하고 싶어서다. 미안하다. 아우야! 고맙다 아우야!

소설가· 건양대교수 tagtag@freech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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