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의 대중문화 째려보기]명성황후와 여성영웅

  • 입력 2001년 6월 29일 13시 51분


수목드라마 <명성황후>가 본격적인 궤도에 올라섰습니다. 대원군(유동근)에게 끌려만 다니던 명성황후(이미연)가 용정을 잉태하면서 극의 긴장감이 더해갑니다. 오래 전에 이문열 선생님의 희곡 '여우사냥'을 읽었지요. 그리고 이 위대한 조선의 국모를 소설로 옮겨보고자 여기저기서 자료를 모았던 적도 있습니다.

케이블TV에서 박종환 감독님의 인터뷰를 보았습니다. 여자축구팀을 지도하고 계신 감독님은 남자보다도 오히려 여자가 더 빨리 세계정상권에 올라설 것이라고 장담하셨습니다. 여자하키, 여자농구, 여자탁구 등 그 동안 여자선수들이 올림픽이나 세계선수권에서 거둔 성적이 이를 증명한다고 하셨지요. 강하고 섬세하며 끈기와 투지까지 고루 갖춘 것이 바로 대한민국의 여자이자 어머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역사소설이나 역사드라마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그들의 고민과 바람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였습니다. 베갯머리 송사의 장본인이거나 질투의 화신, 혹은 욕정의 노예인 경우가 많았지요. 『왕비열전』과 같은 야사들을 읽다보면, 조선시대에 여인들이 이렇게 자기 것밖에 모르는 존재들이었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그러니까 그 속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거의 모두가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일삼고 세력다툼을 이용하여 자신이 미워하는 사람들의 목숨을 쥐었다 놓았다 하니까요.

월화드라마 <여인천하>에 대한 우려도 이것 때문이지요. 문정왕후가 계속 조광조를 위해 이런저런 간청을 중종에게 올리고 있습니다만, 이 드라마의 기본축은 후궁들의 시기와 질투, 그리고 계층 상승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정난정의 모험에 있습니다. 연출의 힘으로 그녀들의 목소리에 힘이 실리고 걸음걸이에서 위엄이 풍겨나오더라도, 저는 그녀들로부터 오랫동안 답습되어왔던 『왕비열전』식 여성상을 봅니다. 정난정의 재빠른 두뇌회전 정확한 사리판단은 놀라울 정도이지만 단지 그것뿐이지요. 그래서 정난정과 그녀가 모신 문정왕후가 원한 세상은 무엇이었단 말인가? 월탄 선생님도 거기까진 쓰지 못하셨습니다.

역사소설이나 역사드라마를 통해 형상화된 여성들은 크게 두부류였지요. 황진이나 이매창처럼 특수신분 속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삶을 살다간 여인들과 정난정이나 장희빈처럼 정치권력의 소용돌이 속에서 영광과 좌절을 맛보았던 여인들입니다. 저는 그녀들이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보편적 근거를 알고 싶었습니다. 그녀들이 품은 세계관이나 이데올로기를 만나고 싶은 것은 저만의 바람일까요?

이 드라마를 통해 개화기를 온몸으로 통과하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했던 조선의 국모가 지닌 사상을 접하고 싶습니다.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농민전쟁 등 굵직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에 대해, 그녀가 어떤 입장을 견지하면서 고종과 조정 대신들을 설득하고 열강의 외교관들을 만났는지 확인하기를 원합니다. 사상논쟁의 현장과 그 논쟁의 이론적 밑바탕을 마련하기 위해 세상을 배우고 익히는 과정을 보고 싶습니다.

<명성황후>는 이제 시작입니다. 이 조선의 국모가 대체 어떤 사상과 힘을 가졌기에, 제국주의 일본이 낭인들을 동원하여 그녀를 죽일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물음의 답이 하나씩 펼쳐지겠지요. 그럴 때만이 우리도 개인적 욕망의 화신이 아니라 보편적 대의를 위해 고뇌하고 투쟁했던 여성영웅을 한 사람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소설가 김탁환(건양대 교수) tagtag@kytis.kony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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