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키즈]<2>뭐하는 짓? 재밌는 짓!

  • 입력 2005년 2월 2일 18시 1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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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키즈의 문화 중 가장 이해하기 힘든 게 기성세대의 눈으로는 무의미(無意味)해 보이는 것에 대한 10대의 몰입이다.

지난달 29일 오후 경기 부천시의 한 카페. ‘펜돌사(펜을 돌리는 사람들)’ 부천지역 회원 중 온라인에서 자주 만나는 중고교생 회원 12명이 모였다. 50여 가지의 펜 돌리기 기술을 구사할 줄 아는 광명시 광문중 3년 김모 군(16)이 다른 학생들 11명에게 ‘네오백’이라는 기술을 전수하고 있었다.

네오백은 손등으로 펜을 돌려 중지에 끼워 마무리하는 어려운 기술. 각자 가져온 펜으로 펜을 돌리느라 정신이 팔려 가끔 펜이 떡볶이 그릇에 떨어져도 아무도 개의치 않았다. 카페에 있던 다른 손님들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이들을 지켜봤다.

김 군은 진지한 표정으로 “손목에 자꾸 힘이 들어가잖아. 부드러움, 스피드, 연결력이 중요해”라고 말하며 계속해서 시범을 보였다.

▽‘무의미’도 모이면 ‘의미’가 된다=펜돌사 회원은 올해 1월 20만 명을 돌파했다. 회원의 80%는 초등학교 5학년부터 고등학교 2학년 사이의 학생들.

운영자인 이순철 씨(26·자영업)는 “2003년 6월 펜 돌리는 장면을 동영상에 올려놓고 사이트를 개설했는데 2년도 되지 않아 회원들이 이렇게 늘어날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서울 영남중 1년 김모 군(16)은 “펜돌사 사이트에 가입한 뒤 하루 4, 5시간씩 펜만 돌리는 저를 보고 부모님이 자폐증에 걸리지 않았는지 걱정했지만 교실에서는 펜 돌리기 고수가 된 저를 부러워하는 친구가 많다”고 말했다.

왜 어른의 눈에는 ‘쓸모없는 것’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것에 10대들은 이처럼 빠져드는 것일까.

인천대 신문방송학과 이동후 교수는 “익명인의 집합인 인터넷에서는 자신을 차별화하려는 욕구가 더 강하기 때문에 독특하고 튀어 보이려는 아이디어가 자꾸 나온다”고 설명했다.

또 인터넷에서는 어떤 아이디어도 누리꾼(네티즌)의 공감만 확보하면 수백만 명의 동조자를 구할 수 있다. 일단 수만 명이 모이게 되면 무의미한 아이디어도 의미 있는 현상이 되고 그 현상은 하나의 생태계가 돼 스스로 진화하게 된다는 것.

인터넷이 확산되기 전에는 이런 현상이 불가능했다. 튀는 아이디어는 동조자를 구하기도 전에 부모나 교사의 인정을 받지 못해 표출하지 못하거나 표출했다가도 곧 묻혀 버렸다.

펜돌사는 올 1월 처음으로 펜 돌리기 대회를 개최했으며 지금도 대회가 진행 중이다.

▽‘의미의 기준’에 대한 도전=네이버, 다음 등 포털에 들어가면 어른의 시각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사이트를 흔히 볼 수 있다. 죽은 척하고 널브러져 있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인터넷에 올리는 ‘시체놀이’ 카페는 다음에만 수십 개에 이른다.

힙합 음악을 목소리와 입으로 흉내 내는 주트박스, 지우개로 글씨를 지울 때 나오는 찌꺼기를 모아 공작물을 만드는 카페, 컵라면 뚜껑을 모으는 모임 등에서는 10대 회원들이 주류다.

어른에게 무의미해 보이는 사이트들이 하루에도 수십 개씩 생겨났다가 사라진다. 사이트의 지속성은 ‘얼마나 오랫동안 재미를 주느냐’에 달려 있다. 이 때문에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현상은 신기하거나 엽기적인 것이 주류를 이루기 쉽다.

시체놀이를 즐기는 서울 일신여상 2년 김모 양(17)은 “왜 이런 쓸데없는 일을 재미있어 하느냐”는 질문에 “어른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내가 즐거움을 느끼고 만족하면 그것으로 가치 있는 것 아니냐”고 되물었다.

사이버문화연구소 최정은정 선임연구원은 “디지털 키즈의 놀이문화에는 어른들이 갖고 있는 ‘의미’와 ‘무의미’에 대한 기준이 정말 맞는 것인지, 인생에서 정말 의미 있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 숨어 있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아저씨가 친구, 동생도 스승”▼


‘봄, 가을 매주 토요일 20∼50대의 오토바이 동호회원과 함께 오토바이 투어, 일요일에는 축구동호회에 나가 25∼45세 회원들과 축구, 한 달에 한 번씩 대학생 및 회사원과 카메라 관련 정보 교류. 가끔 30대 회사원이 주류인 성(性)지식사이트 회원과 친목모임 및 여행.’

인간관계만 보면 30대의 동호회 활동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는 서울 한성고 3년 엄모 군(18)이 인터넷을 시작한 중2 때부터 참여한 각종 인터넷 동호회 활동이다.

▽10대는 ‘디지털 유목민’=10대 내에서도 편차는 있지만 이들은 초등학교부터 사이버 공간을 돌아다니며 수많은 사람을 만난다.

경기 평촌고 2학년 오모 군(17)의 ‘버디버디’와 MSN메신저에는 자신과 상대방이 인터넷에 접속했을 때 바로 대화할 수 있는 200여 명의 명단이 있다

200여 명은 크게 세 부류. 학교에서 만나 오프라인과 온라인에서 교류하는 친구들이 첫째. 채팅이나 동호회에서 만나 오프라인의 만남으로 이어진 사람들이 두 번째. 온라인에서 만난 사람과 수년째 온라인으로만 교류하는 경우가 세 번째다.

10대와 기성세대를 구별하는 결정적인 인간관계는 두 번째. 오 군의 경우 중학생 때부터 ‘이지투디제이’라는 오락실 게임 동호회, 바퀴달린 신발인 ‘힐리스’ 동호회, ‘드럼 마니아’ 등의 동호회 활동을 통해 또래는 물론 대학생, 회사원들과 만나 사귀어 왔다.

오 군뿐만이 아니라 10대 청소년 가운데는 온라인 카페나 동호회 활동을 하는 사람이 많다.

▽자아 형성과 사회화 과정의 변화=기성세대가 10대 시절 가장 영향을 준 사람은 부모, 학교 교사, 친구들이었다. 반면 디지털 키즈는 수많은 스승과 다양한 준거(準據)집단을 갖고 있고 부모와 학교 교사의 영향력은 급격하게 줄고 있다. 준거집단이란 한 개인이 자신의 신념, 태도, 가치 및 행동 방향을 결정하는 데 있어 판단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 사회집단.

기사 서두에 소개된 엄 군은 “내게 세상과 정(情)이 무엇인지 가르쳐 준 이는 동호회에서 만난 아저씨들이었다”고 말했다. 마음이 흔들릴 때 다잡아주고 수능시험을 볼 때 가장 열렬하게 응원해 준 이들이 축구동호회 아저씨들이었다. 여자친구를 사귀며 생긴 여러 가지 고민도 성지식 사이트에서 만난 아저씨들이 상담을 해줬다.

한국청소년 문화연구소 김미윤 선임연구원은 “10대의 인간관계를 조사해 보면 여전히 학교친구 등 또래집단은 중요하지만 인터넷에서 자신이 선택한 다양한 모임에서 만난 사람들도 준거집단으로 떠오르고 있다”고 말했다.

기성세대에는 자신보다 압도적인 지식을 가진 우월한 존재만이 스승이었다. 요즘 10대에게는 다양한 스승이 존재한다. 동년배나 나이가 어린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10여 개의 컴퓨터 동호회에 가입해 ‘컴퓨터 도사’로 불리는 서울 동성고 2학년 이모 군(17)은 “컴퓨터와 관련된 지식은 대부분 컴퓨터 동호회에서 만난 10대와 대학생에게서 배웠다”며 “특정한 스승이 있기보다는 수많은 사람과의 정보 교류를 통해 지식을 습득했다”고 말했다.

▽관계의 밀도에 대한 우려=덕성여대 사회학과 김종길 교수는 “인터넷을 통해 너무 많은 관계 맺기가 가능해지면서 관계의 밀도는 떨어질 수 있다”며 “10대들이 만남을 일시적이고 피상적인 인스턴트 관계로만 파악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기성세대의 우려에 대한 10대의 의견은 엇갈린다.

서울 송곡여고 2년 김모 양(17)은 “인터넷을 통해 맺는 인간관계가 너무 피상적이라는 느낌이 들어 요즘에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걸 꺼린다”고 말했다.

반면 서울 성남고 2년 문모 군(17)은 “나를 깊이 이해해 주는 사람이 없이 어떻게 생활이 가능하겠느냐”며 “인터넷은 다양한 만남의 기회를 제공해 줄 뿐”이라고 반박했다.

▼특별취재팀▼

이병기 기자(팀장) eye@donga.com

정위용 기자 viyonz@donga.com

홍석민 기자 smhong@donga.com

이정은 기자 lightee@donga.com

김상훈 기자 sanhkim@donga.com

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정임수 기자 ims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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