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153>

  • 입력 2009년 8월 6일 15시 28분


[우연은 없다?]

그 저녁, 장충동 체육관에서 기자회견이 열렸다.

결승전이 끝나자마자 터진 테러 때문에 시상식은 취소되었고 기자회견 장소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상암동 로봇격투기 전용경기장은 일부 시설물이 파손되었을 뿐만 아니라, 총체적인 보안점검과 정비를 위해 1년 이상이 필요하다는 전망이 나왔다. 준우승을 차지한 무사시와 3위를 차지한 졸리 더 퀸, 인기상의 자이언트 바바III, 모던테크노상의 M-ALI 등 다른 수상자들이 '안전'을 핑계로 기자회견 참가를 거절했기 때문에, 회견장은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장충동 체육관 화랑관으로 모인 특별시연합 기자들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었으며, <보노보> 소속 로봇 프로듀서와 카메라맨만 분주했다.

기자회견이 열리기 전, 가수 김장훈이 회견장으로 먼저 들어왔다. 상암 경기장에 테러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시상식 식전 행사로 그의 공연이 15분 정도 진행될 예정이었다.

김장훈은 전설적인 라이브 가수다. 20세기 중반에 태어났지만 여전히 정력적인 활동을 선보였다. 2020년 무렵 급격히 기력이 떨어져 더 이상 다이나믹한 라이브 무대를 연출할 수 없게 되자 그는 엄청난 결단을 내렸다. 뇌-기계 인터페이스 (Brain-Computer Interface) 기술과 사이보그를 만드는 바이오닉(Bionic) 기술을 인체에 적용하는 프로젝트에 피실험자로 자원한 것이다. 개그맨 중에 로봇MC 남이 있다면 가수 중엔 김장훈이 있었다. 2020년부터 지금까지 김장훈의 공연은 최신 디지털 기술의 시현 무대로 각광받았다. 이번에는 과연 어떤 공연을 펼칠까 주목을 끌었던 것이 사실이다. 테러 때문에 식전 공연이 취소된 탓인지 김장훈의 표정도 평소와는 달리 어두웠다.

"이건 정말 아닙니다. '배틀원 2049'에 반대성명을 내고 시위를 벌이는 것이야 특별시민으로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만, 경기장을 폭파하는 일은 절대로 용납될 수 없습니다."

"많이 서운하시죠? 이번 공연을 위해 반 년을 준비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덤덤하고 상식적인 위로의 질문이 날아들었다.

"네. 무대와 가수가, 비유가 아니라 정말 한 몸으로 움직이는 공연을 선보이고 싶었습니다. 내가 곧 무대고 무대가 곧 내가 되는 새로운 유비쿼터스 퍼포먼스인데, 아쉽습니다 정말! 하지만 다음엔 글라슈트와 함께 내가 곧 글라슈트이고 글라슈트가 곧 김장훈인 무대를 준비하겠으니, 몇 달만 기다려주십시오."

기자의 목소리가 갑자기 높고 빨라졌다.

"그렇습니까? 김장훈과 글라슈트의 합동 공연. 글라슈트 팀에서도 허락한 사항입니까?"

"물론입니다. 이번 대회에서 글라슈트는 우승후보가 전혀 아니었습니다. 예상 승률도 가장 떨어졌지요. 헌데 강적들을 하나하나 누르고 마침내 최정상에 섰습니다. 이 사연만 담아도 거뜬히 한 편의 로봇 뮤지컬을 만들 수 있습니다. 격투와 아트는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저는 글라슈트의 강인함 뒤에 숨어 있는 피와 땀 그리고 눈물을 특별시민들께 무대 위에서 생생하게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김장훈씨가 글라슈트에게 연기와 노래 지도를 하시게 되겠군요. 김장훈씨는 글라슈트로부터 무얼 배우고 싶으십니까?"

김장훈이 잠시 허공을 올려다보다가 일어서서 오른발을 쭉 뻗은 채 말했다.

"발차기! 발차기부터 배우겠습니다."

잔잔한 웃음이 회견장에 번졌다.

"김장훈 씨는 워낙 아이디어가 풍부하시니까, 기대되는군요. 언제쯤 공연을 시작할 예정이신가요?"

"2049년을 넘기진 않겠습니다. 크리스마스나 연말 공연 무대엔 꼭 올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자, 그럼 저와 한 몸이 되어 돌아올, 오늘의 주인공 글라슈트와 팀장 최 볼테르 교수님을 모시겠습니다."

기자회견이 시작되었다. 기자들의 플래쉬 세례를 받으며, 깔끔한 정장 차림의 볼테르와 다소 몸이 경직된 글라슈트가 회견장으로 걸어 들어왔다. 기자들의 카메라는 글라슈트의 얼굴만큼이나 허리와 그 아래를 찍느라 바빴다. 진풍경이었다. 경기 당시에 떨어져나간 하체 대신 부착된 연습용 '여벌 하체'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조금씩 엇박자로 딱딱 끊기는 느낌이 들었다.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인지, 볼테르는 더 천천히 걸음을 뗐다.

볼테르와 함께 들어온 세계로봇격투협회 이시모 아끼라 회장이 볼테르에게 거대한 우승 트로피를 건넸다. 나중에 따로 공식 시상식을 마련하겠지만, 촬영을 위해서라도 우승 트로피가 필요했던 것이다. 트로피를 받자 볼테르는 왈칵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연단 아래 나란히 선 보르헤스와 세렝게티, 노민선도 눈시울을 붉혔다.

볼테르의 제자 채림, 이민우, 이은주, 이나영 등이 꽃다발을 들고 무대 위로 올라갔다.

"교수님, 축하드려요! 너무 잘 싸웠어요!"

"교수님, 글라슈트 정말 대단했어요!"

기자들의 플래쉬가 터졌다. 눈치 빠른 학생들이 일부러 과장된 몸짓과 소리로, 무사시를 비롯한 격투로봇들의 불참 때문에 가라앉은 회견장 분위기를 띄웠는지도 모른다.

"최볼테르 교수님, 우승 소감 한 말씀 해주시지요."

"감사합니다. 너무 기쁘고 즐겁습니다. 저희 글라슈트를 응원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배틀원 대회 역사상 최고의 깜짝 우승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이번 대회에 참가하실 때, 글라슈트가 어디까지 올라갈 거라고 예상하셨는지요?"

볼테르가 즉답을 하지 않고 성난 눈으로 기자를 쏘아보았다. 당황한 기자가 질문을 조금 고쳤다.

"우, 우승이 처음부터 목표셨나요?"

볼테르가 앞에 놓인 우승 트로피를 쳐다보며 답했다.

"물론입니다. 대회 출전이 결정된 순간부터, 저는 글라슈트의 우승을 단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습니다."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볼테르의 깐깐함을 아는 정훈일 캐스터가 연구원 쪽으로 질문을 돌렸다.

"이번 우승에는 연구원들의 공 또한 적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지금 가장 하고 싶은 게 뭔가요?"

세렝게티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지난 몇 달간 제대로 잠을 못 잤는데, 이제 편히 실컷 자고 싶어요!"

보르헤스가 둥근 배를 디밀며 이어 답했다.

"저는 일단 푸짐하게 코스 요리부터 먹으렵니다. 글라슈트 때문에 늘 패스트푸드로 때웠거든요."

기자들의 시선이 민선에게 향했다. 민선이 안경을 고쳐 쓰곤 포부를 밝혔다.

"이제 시작에 불과합니다. 글라슈트는 '배틀원 2050'에서도 우승할 겁니다. 앞으로 최소한 10년 동안은 글라슈트 천하가 될 겁니다."

글라슈트의 허리에서 갑자기 삐걱삐걱 소음이 들렸다. 2연패의 열망을 품은 이는 민선 뿐인 듯했다.

"마지막 결승전에서 글라슈트의 우승 전략은 무엇이었습니까?"

정훈일의 질문이 다시 볼테르에게 날아들었다.

"무사시에 매달려 머리를 공격하는 전술은 오랫동안 연습해온 기술이었습니다. 글라슈트가 계획대로 잘 따라줘서 우승한 것 같아요."

"그렇다면 무사시가 '목돌리기'가 아닌 '허리 돌리기'가 들어올 것도 미리 예상하고 있었다는 건가요?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었다?"

"물론입니다. 무사시의 1차원적인 언론플레이에 우리가 순진하게 당하진 않죠."

볼테르의 얼굴이 다소 상기됐다.

"간혹 글라슈트가 목을 꺾는 등 이상 행동을 보이기도 했는데요, 그 원인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계신가요?"

현장에서 경기를 중계한 정훈일이었기 때문에, 질문이 더 꼼꼼하고 날카로웠다. 이번에는 볼테르도 기다렸다듯이 바로 양손을 저었다.

"아, 그거 이상행동 아닙니다. 공격적인 상황에서 상대를 위협하는 행동이에요. 아주 무섭지 않았습니까? 저도 이렇게 효과가 클 줄은 몰랐습니다만."

정훈일은 의심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눈으로 글라슈트를 흘끔 올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점점 내려와서 로봇의 허리에 멈췄다.

"그렇군요. 경기 중엔 참으로 이상했는데, 글라슈트의 그 모든 행동들을 글라슈트 팀이 미리 준비한 것이군요. 글라슈트의 떨어져나간 하체는 지금 어디 있나요?"

볼테르가 한 시름 놓은 듯 손바닥으로 이마의 땀을 훔친 후 답했다.

"수리 중입니다만…… 수리가 끝나면, 대치동 로봇역사관에 영구전시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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