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8월의저편 499…목격자 (15)

  • 입력 2004년 2월 11일 19시 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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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죠. 심취란 말을 내 몸으로 실감했습니다. 그날 당장 조선민주애국 청년동맹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등사판 ‘공산당 선언’을 빌려서, 그날 밤 이불 속에서 읽었죠…다섯 번…다섯 번을 한 줄도 빼지 않고 소리내어 읽었습니다. 공산당은, 그 주의정견을 은폐하는 것을 수치로 여긴다. 그들은 공공연하게 선언한다. 그들의 목적은 종래의 모든 사회 조직을 힘으로 전복함으로써만 달성된다. 지배계급으로 하여금 공산주의 혁명 앞에 전율케 하라. 프롤레타리아는 자신의 목줄 외에는 잃을 것이 없다. 그러나 그들은 획득해 마땅한 전 세계를 갖고 있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책을 베개 위에 엎어 놓고 나는 일어섰습니다. 경남상고 육상부의 유니폼을 갈아입고…빨간 바탕에 하얀 줄이 가로로 들어가 있는 러닝셔츠와 검은 바탕에 하얀 선이 세로로 들어가 있는 짧은 바지입니다…나는 기숙사 밖으로 뛰어나갔습니다. 하늘에는 아직도 별이 총총하고, 나는 담을 뛰어넘었습니다…높이 2m쯤 되는 담이죠…아아, 여기가 교문입니다, 구덕운동장이 있고 학교 건물이 있죠? 여기에 담이 있어요, 담 너머가 우리 기숙사입니다. 원래는 일단 밖에 나갔다가 빙 돌아서 이렇게 가야 되는데, 멀리 돌아가야 하니까, 다들 담을 뛰어넘습니다…지도요? 당신네들도 다 알잖습니까?…네 네, 그리죠…아! 아이구 손가락이…펜을 쥘 수가 없군요…네에, 왼손으로 그리겠습니다…담을 넘으면, 오른쪽에 야구장, 왼쪽에 수영장이 있습니다. 보리밭을 지나면 산, 산이라고 하면 좀 과장이고, 언덕입니다, 언덕, 언덕 꼭대기에 저수지가 있어요…왼손이라 선이 제대로 그어지지가 않는군요…이 정도면 알겠습니까?…아아, 어디까지 얘기했죠?…아, 밤새워 ‘공산당 선언’을 읽고, 담을 뛰어넘었다고 했죠…나는 달렸습니다…날은 아직 어둑어둑했지만, 200m 트랙의 하얀 선은 뚜렷하게 보였습니다. 전력질주를 했죠. 한 바퀴, 두 바퀴…열 바퀴까지 세다가 그 다음에는 그만두었습니다. 그저 온 마음을 다해서, 마지막 세 줄을 외쳤습니다. 프롤레타리아는 자신의 목줄 외에는 잃을 것이 없다. 그러나 그들은 획득해 마땅한 전 세계를 갖고 있다. 나는 나를 옥죄고 있는 목줄을 끊고 골을 향해 뛰었습니다. 날이 완전히 밝았습니다. 나는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나는 일개 프롤레타리아였습니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번역 김난주 그림 이즈쓰 히로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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