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8월의저편 452…잃어버린 계절(8)

  • 입력 2003년 10월 27일 18시 2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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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모리 기와는 깊은 절망감에 빠질 것 같아 산꼭대기로 눈길을 돌렸다…신사가 없다…가곡동 밀양 신사만 불태운 게 아닌가 보군…아니 벚나무도 없잖아…베어버린 모양이야…벚나무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그런 몹쓸 짓을…죄…그렇다면 누구에게 죄가 있는데? 일본 사람에게? 나에게? 대체 무슨 죄가? 기와는 슬픔과 분노로 오히려 머릿속이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 사람이 죽을 때, 손을 꼭 쥐고 있는데 온기가 사라지면서, 내 손바닥 구석구석까지 싸늘한 한기가 퍼졌을 때의…그 느낌하고 비슷하다.

다시 눈길을 밀양강으로 돌리자, 삼각주에 황새 한 쌍이 있었다. 너무 멀어서 잘은 안 보이지만, 몸짓으로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부리를 커다란 날개 속에 처박고…털을 다듬고 있군…황새 처음 보는 것 같네…아니지, 늘 보면서도 눈여겨보지 않은 거지. 오늘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눈에 보인다. 내가 보려 하지 않아도, 상대가 내 눈 속으로 뛰어든다…아아, 그렇지…안녕이라고 작별 인사를 하나 보다…들리고말고…안녕…안녕…기와는 양산을 왼손에 옮겨 쥐고, 오른손을 들어 강에게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때 돌계단 아래에서 하얀 러닝셔츠에 짧은 바지 차림의 청년이 뛰어올라왔다. 앗, 기와는 조그맣게 소리 지르고 양산을 뒤로 젖혔다.

“이우근씨죠?”

청년이 멈춰섰다.

“이나모리 기와라고 해요. 청년을 받았던 산파입니다.”

“…아, 예…어머니한테서 말씀 들었습니다. 형님한테서도….” 우근은 숨을 고르면서 셔츠 깃에서 수건을 꺼내 땀을 닦았다.

“하고 싶은 말이 좀 있는데.”

“…그럼, 영남루 정자로 가시죠.”

“네, 그래요.”

기와는 옆에서 나란히 걷는 청년의 얼굴을 보려고 양산을 접었다.

“갓 태어났을 때는 얼굴이 5월인형*처럼 생겼었는데, 지금은 위태천(爲太天) 같군요, 오호호호호.”

“여기 앉으시죠.” 우근은 쑥스러운 듯이 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옛날 얘기 좀 해도 될까요?”

“네.”

*5월인형:5월 단오절에 사내아이를 위해 차려 놓는 무사 차림의 인형.

글 유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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