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661>卷七.烏江의 슬픈 노래

  • 입력 2006년 1월 10일 03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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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신은 여러 대를 산양(山陽) 땅에 살아온 옛 초나라의 유민으로서 부조(父祖)로부터 물려받은 간절한 염원은 초나라가 망국(亡國)의 한을 씻고 다시 일어나 번성하는 것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대왕께서 일어나시어 진나라를 쳐 없애시고 서초(西楚)를 일으키시니 일생의 한이 풀리는 듯했습니다. 비록 몸은 구차한 식객(食客)으로 한왕의 막하에 빌붙어 지내나 마음은 언제나 조국 초나라의 천하 제패(制覇)를 빌었습니다.

그런데 이 몇 달 가까이서 살펴보니 초나라의 군사는 장마철 길 위의 수레바퀴 자국에 사는 미꾸라지 같은 신세가 되고, 대왕께서 위태롭기는 불붙은 섶 위에 취해 잠드신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비가 그치고 수레바퀴 자국의 물이 마르듯 그때그때 겨우 대던 군량마저 끊어지면 범 같은 강동 용사들의 의기도 아무 쓸모가 없으며, 이미 대왕의 섶에 옮아 붙은 한신과 경포 팽월이 지른 불길은 이대로 두면 머지않아 대왕까지 살라버릴 것입니다.”

후공이 거기까지 말했을 때 패왕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소리쳤다.

“닥쳐라! 그 무슨 무엄한 소리냐? 곱게 삶기기가 싫어 혀까지 뽑히려 드느냐?”

벽력같은 고함이었지만 후공은 몸도 한번 움찔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패왕의 말을 받았다.

“신의 말이 틀렸으면 무사들을 수고롭게 할 것 없이 스스로 가마솥에 뛰어들 것이니, 대왕께서는 부디 신이 하는 말을 마저 들어 주십시오. 대왕께서는 어찌하여 하루빨리 한왕과 화평을 맺으시고 팽성으로 돌아가 뒷날을 기약하지 않으십니까? 기름진 오초(吳楚)의 땅으로 군사를 물려 오래 굶주린 그들을 배불리 먹이면 저 거록(鉅鹿)을 구하고 함곡관을 깨뜨릴 때의 투지와 기백을 되찾기는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다음 진나라의 원교근공(遠交近攻)을 배워 먼저 가까이 있는 경포와 팽월부터 잡아 죽이고 다시 동쪽으로 한신을 쳐부수면 홀로 남은 한왕 유방을 사로잡는 일은 손바닥에 침 한번 뱉는 것으로 넉넉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대왕께서는 쌀 한 톨 없는 동(東)광무 꼭대기에 굶주린 대군을 묶어놓으신 지 벌써 열 달이 넘습니다. 한왕이 자리 잡은 서(西)광무는 오창이 멀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대로 큰 뒤주 같은 혈창(穴倉)을 품고 있어 군량을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거기다가 한왕은 관중(關中)과 산동(山東)뿐만 아니라 북맥(北貊)에서까지 군사를 끌어와 한군은 머릿수로도 초군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또 신이 알기로 한왕은 사방으로 제후들을 꾀어 초나라의 양도(糧道)를 끊고, 대왕의 근거가 되는 팽성까지 위태롭게 만들고 있습니다.

따라서 대왕께서는 굶주린 군사로 배부른 군사를 에워싸고 계시며, 적은 군사로 많은 군사를 에워싸고 계시며, 돌아갈 땅마저 위태로운 군사로 든든한 제 땅을 등지고 싸우는 군사를 에워싸고 계신 꼴입니다. 하지만 그나마 이제 대왕의 날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초군의 군량이 다하고 구원하러 올 우군(友軍)도 없다는 것은 한왕도 잘 알고 있습니다. 팽성이 떨어지기를 기다려 대군으로 동 광무를 에워싸고 거꾸로 쳐 올라오면, 굶주린 데다 돌아갈 곳 없어 의기마저 상한 초나라 군사가 어떻게 그들을 당해내겠습니까? 아무리 천신(天神) 같은 대왕의 무용인들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지 않는 바에야 어찌 이 높은 광무간을 뛰어 내려 빠져나가시겠습니까? 이에 신은 감히 대왕의 장례가 멀지 않았다고 아뢰는 것입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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