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325>卷四. 흙먼지말아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12월 6일 18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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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장수들을 다스리고 군사를 부려 적을 쳐부수는 일은 바로 대장군의 소임이오. 그런데 대장군께서는 어찌 남의 일 보듯 말하시오.”

그때 장량이 끼어들었다.

“우리가 팽성에 든 이래 아래 위가 아울러 재물에 홀리고 술과 여자에 취해 흥청거리느라 대장군의 군령이 제대로 서지 못했습니다. 대왕께서는 대장군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으시고, 제후들도 저마다 전리(戰利)를 취하느라 혈안이 되어 그 명을 받들지 않은 까닭입니다. 거기다가 장졸들마저 제멋대로 하기가 양떼같이 된지 오래이니 대장군이 무슨 수로 그들을 부려내겠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대장군과 자방 선생은 과인의 허물을 물어 몰려오는 적을 그냥 보고만 있겠다는 것이오?”

마침내 한왕이 은근히 노기까지 띠며 물었다. 그제야 한신이 퍼뜩 그동안의 무력감과 마비에서 깨어나며 말했다.

“예부터 남의 신하되어 임금의 지난 허물을 들추는 법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다만 대왕께서는 이제부터라도 제후들을 엄하게 단속하시어 우리 힘이 헛되이 나뉘고 흩어지는 일이 없도록 해주십시오. 저는 장졸을 꾸짖어 돌아오는 패왕의 대군을 막아보겠습니다.”

그리고는 한동안 손놓고 있던 대장군의 소임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래도 한신은 이전에 보여준 대장군의 기량을 바로 되살려내지는 못했다. 술 취해 허둥거리는 장졸 몇을 베어 성안의 군령을 세우고, 팽성 동쪽으로 흩어져 약탈을 일삼고 있는 제후들의 군대를 불러들이게 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다음날의 싸움에서 보인 채비와 안배는 느슨하기 짝이 없었다.

한신은 관영과 조참의 무서운 전투력과 그들이 이끄는 군사들의 드높은 사기를 믿었다. 그리고 위왕(魏王) 표(豹)가 안에서 지키는 소성(蕭城)의 높고 굳셈을 높이 쳐 팽성 서쪽 일을 걱정하지 않았다. 서문은 군사를 풀어 지키는 시늉만 내고 한군(漢軍)의 주력은 간밤 유성(留城)에 있었다는 패왕이 치고들 북문 쪽으로 몰아놓았다.

그런데 정오가 되기도 전에 서문 쪽에서 먼저 급한 전갈이 날아들었다.

“오늘 새벽 소성이 떨어지고, 패왕이 이끄는 대군은 이제 팽성으로 달려오고 있습니다.”

소성에서 간신히 달아나 얼결에 팽성으로 길을 잡게 된 위군(魏軍) 사졸 하나가 서문으로 달려와 그렇게 두서없는 소식을 전했다. 너무 뜻밖이라 잠시 어리둥절해 있던 한신이 서문으로 달려가 보니 벌써 멀리 서편 하늘에 자우룩하게 먼지가 일고 있었다.

“관영과 조참은 어찌되었느냐? 또 위왕(魏王)과 하남왕(河南王)은 어디 있느냐?”

“관영과 조참 두 분 장군께서는 진작 전세가 이롭지 못함을 아시고 군사를 물려 서쪽으로 몸을 빼셨다고 합니다. 성 밖에서 갑작스레 초나라 군사를 맞게 된 하남왕은 패왕에게 죽음을 당하셨고, 우리 대왕께서는 성 밖으로 구원을 나오셨다가 패왕의 기세에 몰려 성안으로 되돌아가시지 못하고 하읍(下邑)쪽으로 물러나셨습니다. 저도 대왕을 따라 북쪽으로 달아났으나 도중에 초나라 군사에게 길이 막혀 이리로 달려오게 된 것입니다.”

그 군사가 그렇게 상세하게 그 새벽 소성에서 벌어졌던 일을 들려주었다. 한신은 급히 사람을 북문 쪽으로 보내 그곳에 몰려 있는 한군의 주력을 서쪽으로 돌리게 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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