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287>卷四. 흙먼지말아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10월 22일 18시 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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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적도들은 성안의 곡식을 모조리 거두고 장정들까지 뽑아 세력을 배나 불린 뒤에 급히 성을 떠났다고 합니다. 성안에는 곡식 한 톨, 장정 한 명 남아있지 않습니다.”

역성(歷城) 안을 돌아보고 온 집극랑(執戟郞) 하나가 패왕 항우에게 그렇게 알려왔다. 그 말에 패왕의 결기가 다시 울컥 치솟았다.

“쌀 한 톨 장정 하나 남아있지 않다면, 이는 틀림없이 빼앗긴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바친 것이다. 그리고 적도들에게 모든 것을 스스로 바친 성이라면 우리 서초(西楚)나 과인에게는 있으나마나한 성이다. 이제부터 성안은 불사르고 남아 있는 노소는 모두 부로(부虜)로 잡으라. 성벽을 허물고 해자를 메워 다시는 적도가 몸담을 수 없는 곳이 되게 하라!”

그렇게 명을 내려 또 한번 제나라 사람들의 가슴을 깊이 파 뒤집어 놓았다. 하지만 그 끔찍한 짓에 또 한나절을 허비해 성양으로 가는 길은 그만큼 더디어질 수밖에 없었다.

한편 이때 전횡(田橫)은 이미 3만 대군을 모아 성양을 에워싸고 있었다. 성양은 옛 노나라의 속국인 거(거) 땅에 세워진 성으로, 그 형 전영(田榮)이 패왕 항우와 싸워 크게 낭패 본 곳이기도 했다. 그때는 패왕이 왕으로 앉힌 전가(田假)가 역시 패왕이 딸려준 군사 만여 명과 더불어 지키고 있었다.

“항우가 멀리 임치까지 짓밟고 다시 길을 되짚어 이리로 내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어서 성양을 떨어뜨려 근거를 마련하고 항우에게 맞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횡이 성을 에워싸고 있을 뿐, 선뜻 들이치지 않는 걸 보고 그 부장들이 그렇게 재촉했다. 하지만 전횡은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우리 군세로는 아무 손상 없이 성양을 손에 넣어도 항우로부터 성양을 지켜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오. 그런데 다시 굳게 지키는 성을 공격하다가 군사라도 크게 상하는 날이면 그 일을 어찌하겠소? 반드시 계략을 써서 우리 군사를 상하지 않고 성을 떨어뜨려야 하오.”

그런 전횡의 말에 종제 전기(田旣)가 한 꾀를 내었다.

“성양은 선왕(先王=전영)께서 항우와의 싸움에 근거로 삼고자 공들여 민심을 수습한 땅입니다. 비록 선왕께서는 싸움에 지고 쫓겨나셨으나, 성안 백성들 가운데는 선왕의 위덕(威德)을 기리는 이들이 아직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밤 성안으로 글을 매단 화살을 날려 보내 그들을 한번 달래보면 어떻겠습니까? 먼저 전가(田假)를 목 베고 성문을 여는 자는 천금의 상을 주고 대장군으로 삼을 것이요, 그를 도운 성안 백성들도 모두 전보다 더한 은의로 대할 것이라고 하십시오. 그런 다음 이번에는 전가와 초나라에 빌붙으려하는 백성들을 겁주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속아 미련스레 성안에서 머뭇거리다가 성이 깨어지는 날에는, 부조(父祖)의 나라를 저버린 죄를 물어 죽은 넋조차 돌아갈 곳이 없게 만들겠다고 하면, 성안 백성들의 마음이 달라질 것입니다.”

전횡이 들어보니 그럴 듯했다. 곧 흰 비단을 찢어 글을 쓰고 화살 끝에 매단 다음 성안으로 쏘아 보내게 했다. 전횡의 군사들이 그런 화살을 성안으로 쏘아보내기 수십 차례였으나 낮 동안 성안은 괴괴하기만 했다.

하지만 밤이 되자 뭔가 심상찮은 수런거림이 성 밖에서도 희미하게 느껴졌다. 그런 말을 전해들은 전횡이 가만히 명을 내렸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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