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154>卷三. 覇王의 길

  • 입력 2004년 5월 17일 18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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鴻門의 잔치 ⑫

“아닙니다. 패공의 시커먼 속셈은 이미 다 드러났습니다. 항백이 공연히 사사로운 정으로 장량을 찾아갔다가 패공의 수작에 말려든 것이니, 결코 그 말을 믿어서는 아니 됩니다.”

범증이 그렇게 목청을 높였다. 항량이 정도(定陶)에서 죽은 뒤 항우는 한동안 계포(季布)나 한신(韓信) 같은 모사들뿐만 아니라 범증까지도 깊이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 뒤 어려운 싸움을 헤쳐 오는 동안 범증은 차츰 항우의 믿음을 회복했다. 그러다가 관중으로 들어온 뒤에는 오히려 예전보다 더한 믿음과 우러름을 받았다.

항우는 범증을 아부(亞父)라 높여 부르며 책모(策謀)라면 그밖에 없다는 듯 다른 막빈들의 말은 전혀 들으려 하지 않았다. 아부라면 아버지에 버금가는 어른이란 뜻이니, 그때 항우가 어떻게 범증을 대하고 있었는지를 짐작케 하는 호칭이다. 그런 범증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오자 항우는 다시 마음이 흔들렸다.

“그렇다면 어찌해야겠소?”

“원래 뜻하신 대로 반드시 패공을 죽여야 합니다.”

“그렇지만 사냥꾼도 품안으로 날아드는 새는 쏘지 않는다는데, 제 발로 나를 찾아온 사람을 차마 어떻게 죽일 수 있겠소?”

“제 발로 찾아온다면 차라리 잘되었습니다. 힘들여 싸울 것도 없이 패공을 죽일 수 있게 되었으니, 그 또한 상장군의 복입니다.”

범증이 그렇게 말하자, 항우가 얼른 대답이 떠오르지 않는지 멀거니 범증을 건너보기만 했다. 힘을 얻은 범증이 허리띠에 걸고 있던 옥결(玉결)을 빼들며 말했다.

“내일 패공이 와서 무슨 소리를 하더라도 결코 거기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크게 잔치를 벌여 겉으로는 패공을 환대하는 척하다가, 때를 보아 죽이면 힘들이지 않고 우환거리를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이 옥결을 쳐들어 보이거든 상장군께서는 단칼에 패공을 베어 버리십시오. 털끝만큼도 칼날에 인정을 남겨서는 아니 됩니다.”

“알겠소. 내일 패공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나 들어보고 군사(軍師)의 가르침대로 하겠소.”

범증의 표정이 워낙 엄중해서인지 마침내는 항우도 그렇게 범증의 뜻을 따라주었다.

이튿날 아침 일찍 패공은 믿을 만한 장졸 100여 기(騎)만 이끌고 패상(覇上)을 떠났다. 그 100여 기에는 번쾌와 장량도 들어 있었다. 정오 무렵 하여 홍문(鴻門)에 이른 패공은 바로 항우의 군막을 찾았다.

패공과 그를 따르는 100여 기가 군문(軍門)을 지나려 하자 항우를 호위하는 군사들이 앞을 막았다. 이에 패공은 번쾌를 비롯한 장졸들을 모두 군문 밖에 세워두고 장량만 거느린 채 안으로 들어갔다. 번쾌가 억지로 따라 들어오려 하자 장량이 눈짓으로 말리며 속삭였다.

“장군은 잠시 군문 밖에서 기다리시오. 장군이 패공을 위해 죽어야할 때가 오면 반드시 달려와 알려 드리겠소!”

패공과 장량이 항우의 군막에 이르자 기다리고 있던 항백이 나와 그들을 맞아들였다. 패공은 항우 앞에 서게 되자마자 주변의 이목을 아랑곳 않고 땅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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