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305)

  • 입력 1999년 12월 24일 15시 46분


그는 아마도 내가 먼저 잠들고 나서 혼자 부엌을 정리해 주고는 돌아갈 생각이었던 모양이지요. 부엌에서 일을 끝내고 나와 발끝 걸음으로 걸어 다니며 불을 끄고 잠시 의자에 앉아서 쉬고 있다가 깜박 잠이 들었겠지요. 나는 그를 깨우지 않고 로프트로 올라가 침대에 누웠습니다. 그는 아래에서 코를 골지는 않았지만 아이처럼 잠결에 무얼 먹는지 가끔씩 입맛을 다셨어요. 나는 정말 오랜만에 혼자 있지 않다는 안도감과 따스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나는 그와 한 공간에서 하룻밤을 지낸 셈이었지요.

칠 월이 되면 베를린은 점점 떠나는 사람들이 많아져요. 해변이나 산을 찾아 남부 독일이나 해외로 떠나고 학생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아니면 일거리가 많은 서독 쪽으로 나가니까요. 유학생들 중에도 방학 동안에 일시 귀국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공원에는 개와 노인들만 남게 되지요. 한 여름이 되어 해가 점점 길어져서 밤 열 시 까지 어슴프레한 저녁녘의 박명이 남아 있어요. 아직 초저녁인가 하고 시계를 보면 이미 깊은 밤이 되어 있다는 그런 식이예요. 내가 서양 말로는 마로니에라고 하는 칠엽수 나무와 친해졌다구 그랬지요. 내 부엌 창가에까지 우람한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었는데 바람 부는 날이면 유리창에 닿은 가지와 나뭇잎이 내게 말을 거는 것처럼 들렸어요. 그 무렵에 이 선생은 무엇인가 맛있는 먹을 것에 대한 계획을 세워 가지고 장을 보아 오는 거예요. 그러한 어느 더운 저녁 무렵에 그가 소면

이며 열무김치 등속을 가지고 왔지요. 그는 큼직하고 통통한 과일 쨈 담는 병에 국물이 가득한 열무김치를 담아 가지고 왔어요. 아니, 배추도 식품점이나 터키 상점에나 가야 중국 배추라고 간신히 구할 판인데 웬 열무가 다 있냐고 놀랐어요. 그랬더니 광부로 오신 분이 근교에서 땅을 임대해 농사를 짓는데 거기서 벼라별 우리 채소가 모두 생산된다는 거예요. 여름철 대목 장사가 바로 열무 재배래요. 물론 그걸 사다가 김치를 담근 사람은 이희수씨구요. 소금에 절여 갖은 양념 하는 건 다 알지만 찹쌀 풀을 쑤어서 고춧가루와 함께 헝겊 주머니에 넣어 익힌 소금물에 우려내는 건 나두 처음 알았어요. 열무 물김치에 육수를 섞는데 고기는 안쓴대요. 더운 여름철엔 맑고 청량한 맛이 나지 않는다나 뭐라나. 왕멸치를 머리와 내장을 따고 마른 팬에다 볶아서 찬물에서부터 우리다가 끓기 시작하면 들어낸대요. 그래야

비린내 없이 담백한 멀국 맛이 난다지요. 국물을 식혀서 열무김치 국물에 섞어요. 소면을 살짝 삶아 찬 물에 헹궈 내어 열무김치 건더기를 면 위에 얹고 국물을 부어요. 우리는 칠엽수가 바람에 너울대는 부엌 창가의 양철 간이식탁 앞에 머리가 부딛칠 정도로 가까이 마주 앉아서 열무김치 소면을 먹었어요. 그 해 여름 베를린에서. 후루룩 후루룩 염치 없는 소리를 한도 없이 내면서 맛있게 먹었어요.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게 꼭 허허허 웃는 소리처럼 들렸어요.

분데스 알레 거리를 가로지르는 폭스 공원이 그와 내 거처의 중간 지점이었는데 우리는 서로 각자의 집에서 출발해서는 어린이 놀이터 근처의 잔디밭 가운데서 마주치곤 했어요. 이미 그와 나는 서로의 일상 속으로 들어갔던 겁니다. 그 여름의 막바지에 나는 공원에서 그의 집으로 갔다가 폭우 때문에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고 거기서 잤어요. 우레 소리가 대단했답니다. 창문이 덜컹거릴 정도였지요. 우리는 둘 다 어이가 없어서 고개를 움츠리며 외쳤어요. 되게 겁 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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