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여자의 사랑(74)

  • 입력 1997년 3월 20일 07시 48분


가을이 깊어지는 동안 〈29〉 『그런데…』 하고 다시 그가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꼭 일년 전의 일이었다. 그때 그는 여자의 몸 위에서 반쯤 감은 여자의 눈을 내려다보았다. 다시 그 눈을 보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게 아니라 머리 속에 어떤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오직 그녀의 몸위에서 거칠고 서툰 몸짓으로 그녀의 몸과 그녀의 머리 속에 지워지지 않을 기억처럼 남아 있는 한 남자의 기억과 이미지를 훼손시켰다. 그리고 일년이 지난 다음 그 여자가 그 앞에 와 있는 것이다. 『혹시,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오빠에게 그 남자에 대해 물었어요』 『그러면 제가 여자 친구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겠군요』 그는 자기가 여자에게 해야 할 말을 생각보다 빨리 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 말로 그는 여자가 자기의 처지를 이해해주길 바랐던 것인지도 모른다. 『예』 여자는 낮고 짧게 대답했다. 『오지 않아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요』 그가 말을 하지 않자 다시 여자가 말했다. 그는 그 말을 받지 않았다. 어쨌거나 여자는 지금 자기 앞에 와 앉아 있었다. 어떤 일에도 이유라는 건 늘 많을 것이다. 여자의 눈이 그 이유를 말하고 싶어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아까 보았던 맞은편 벽의 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계는 고작 십오분이 지났을 뿐이었다. 『그 오빠는 제게 그런 이야기를 잘 해요』 여자는 드문드문 그렇게 입을 열었다. 그의 대답을 기다리다가 그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면 다시 여자가 입을 여는 식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말들 어느 것이나 단편적이어서 그는 지금 우리는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거지, 하는 생각을 잠시했다. 『그때 그 사람도 사실은 그 오빠 친구였고요』 그는 잔 밑에 남아 미지근하게 식은 커피를 마저 입으로 가져갔다. 『그 사람은 졸업을 하고 군에 간 거였는데…』 『그랬군요』 오랜만에 그가 여자의 말을 받았다. 두 사람의 대화는 서로 접속이 잘 안되는 코드와 플러그처럼 보였다. 『그 오빠가 말하는 김운하라는 사람이 그 때 그 사람인지는 정말 몰랐어요』 그는 가능한 한 여자 앞에서 과거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글:이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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