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묵의 ‘한시 마중’]<27>달밤의 눈 덮인 갈대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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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2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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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눈이 많이 내린다는 대설(大雪)입니다. 의병장으로 알려져 있지만 시인으로도 명성이 높았던 고경명(高敬命·1533∼1592)의 이 작품은 대설에 잘 어울립니다. 이 시는 고기잡이배를 그린 그림에 붙인 것입니다. 원경은 하얀 눈으로 덮여 있고 근경에는 모래톱의 갈대가 바람에 꺾여 반쯤 누워 있습니다. 다른 쪽에는 하늘에 달이 떠 있고 아래편 강물에는 배 한 척이 놓여 있습니다. 가운데 뿌연 안개 속으로 새 한 마리가 하늘로 날아오릅니다. 그림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림에 쓴 시는 그려진 그림의 의미를 설명하고 더 나아가 그림으로 그릴 수 없는 것까지 말해줍니다. 갈대가 반쯤 누워 있는 것을 보니 바람이 부나 봅니다. 갈대밭 위쪽은 아무것도 그리지 않았으니 산과 강과 들이 온통 눈으로 덮여 있을 겁니다. 갈대를 눕히는 바람이 있으니 눈도 하늘 가득 휘날리겠지요. 이런 풍광을 보고 벗과 술 한잔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배로 술을 사와서 벗과 마주하였습니다. 그때 마침 눈이 그치고 달이 환하게 올랐습니다. 흥이 더욱 높아지니 퉁소를 한 곡 불지 않을 수 없겠지요. 그 순간 새 한 마리가 안개 속으로 날아오릅니다. 눈으로 온 세상이 훤하고 달빛까지 밝은 데다 퉁소 소리가 울려 퍼지니, 자던 새가 놀라서 둥지 위로 날아오른 것입니다. 갈대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 삐걱삐걱 노를 젓는 소리, 맑게 퍼지는 퉁소 소리, 놀라 날아오르는 기러기 소리, 그림으로 그릴 수 없는 음향이 시를 통해 울려 퍼집니다. 그러면 갈대와 배와 기러기도 따라서 살아 움직입니다. 활화(活(화,획))라는 말은 이 시를 두고 이른 듯합니다.

이종묵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한시#갈대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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