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계 숨은 꽃]서울시향 악보전문위원 김진근씨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6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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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곡 꿰뚫는 무대 뒤의 음악가… 그의 악기는 악보

《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배우와 가수, 공연의 시작점을 찍는 작가와 마침표를 찍는 연출가, 무대를 휘어잡는 지휘자와 화려한 실력을 뽐내는 연주자 그리고 이들을 불러 모아 판을 벌이는 프로듀서…. ‘공연계 숨은 별’은 이들처럼 주목받진 못하지만 공연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을 하는 직종의 세계를 해당 분야 전문가를 통해 소개하는 새로운 시리즈다. 공연 분야가 전문화되면서 등장한 다종다양한 전문 분야에 눈을 돌려본다. 》
7일 서울시립교향악단 악보실에서 만난 김진근 악보전문위원. 그는 “악기가 총이라면 악보는 총탄이다. 공연일은 임박해 오는데 레퍼토리가 정해지지 않을 때 악보 담당은 속이 바짝바짝 탄다”고 말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7일 서울시립교향악단 악보실에서 만난 김진근 악보전문위원. 그는 “악기가 총이라면 악보는 총탄이다. 공연일은 임박해 오는데 레퍼토리가 정해지지 않을 때 악보 담당은 속이 바짝바짝 탄다”고 말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바퀴 달린 이동식 상자 위에는 플라스틱 자와 칼, 가위, 스카치테이프와 풀이 놓여 있다. 사방에 푸른색 표지로 묶은 두툼한 종이뭉치가 차곡차곡 쌓여 있다. 유성매직으로 적어 놓은 것은 생상스 교향곡 3번, 베를리오즈 ‘로마의 사육제’, 유카 티엔수의 ‘스피리티’…. 이곳은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악보실이다.

타악기 연주자 김문홍 씨가 들어왔다. “강변음악회 팝스 레퍼토리요.” 이어 첼리스트 반현정 씨가 들어와 물었다. “22일 연주회, 클렝겔 악보 있어요?” 김진근 악보전문위원(38)은 회색 캐비닛을 열고 망설임 없이 연주자가 원하는 악보를 내줬다. 손가락 끝에 눈이라도 달린 듯 빽빽한 악보 더미에서 율리우스 클렝겔의 ‘12대의 첼로를 위한 찬가’를 정확히 집어냈다. 김진근 위원은 김보람 위원(30)과 함께 서울시향에서 악보를 담당하고 있다. 김보람 위원은 “악보 담당이라고 하면 악보를 복사해서 연주자들에게 나눠주는 일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음악 전공자도 그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복사와 배포는 이들의 다양한 업무 중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

지휘자가 공연 프로그램을 정하면 악보 담당은 해당 악보의 보유 여부를 먼저 살핀다. 없다면 그 악보가 어디에 있는지 검색한다. 없는 악보는 공연 석 달 전부터 구입이나 대여를 통해 확보한다. 같은 곡이라 하더라도 갖가지 버전이 있고 편집 상태가 다르기 때문에 어떤 악보 전문 출판사에 좋은 악보가 있는지 책이나 인터넷, 각국 악단의 악보 전문위원들끼리 네트워크를 이용해 최상의 악보를 찾기 위해 애쓴다.

클래식 작품별 버전 정보를 수록한 데이비드 대니얼스의 ‘오케스트럴 뮤직’은 악보 담당의 경전이다. 스트라빈스키의 ‘불새’의 경우 무용을 위한 전체 버전, 모음곡 형태의 1911년, 1919년, 1945년 판, 모음곡 중 일부만 발췌한 버전 등 5종류가 있다. 서울시향의 정명훈 예술감독은 1919년 버전을 사용한다.

악보를 확보한 뒤엔 이를 보고 편성 규모를 확인해 연주자가 충분한지 확인해야 한다. 현대음악은 특수기법으로 연주하는 부분이 더러 있는데 이를 미리 스태프와 연주자에게 알려주는 것도 악보 담당의 일이다. 영화음악이나 뮤지컬 넘버 등이 레퍼토리로 정해지면 리허설 전까지 오케스트라용 악보가 있는지 없는지, 있다면 어떤 종류가 있는지, 그 가운데 오케스트레이션이 가장 좋은 것은 어떤 것인지 파악해야 한다. 악보가 없다면 전문가를 섭외해 편곡을 맡겨야 한다.

리허설과 연주 때 각 연주자의 보면대(譜面臺)에 정확한 악보를 놓아 두는 일, 공연이 끝난 뒤 악보를 회수하고 관리하는 일도 이들 몫이다. 김진근 위원은 “다른 오케스트라에서 있었던 일”이라며 “고스란히 반납해야 할 희귀 대여 악보였는데 연주자가 가변형 무대 틈으로 떨어뜨려 무대 장치를 다 들어내고 악보를 꺼낸 적도 있다”고 말했다.

악보를 해석하는 눈은 악보 담당의 기본 조건. 음악이론, 음악사, 관현악법, 이조(조옮김)법 및 기보법, 연주곡목 등의 음악지식 외에도 음악산업, 출판업, 저작권법까지 두루 지식을 갖춰야 한다. 김진근 위원은 작곡을 전공했고 김보람 위원은 트럼본을 전공했다. 국내 악보 담당 정직원은 50여 명에 이르지만 이를 위한 교육과정이나 기관은 국내에 없다. 악보 담당 업무에 관심이 있는 이는 각 지역 악단의 악보실에서 작은 경험이라도 차곡차곡 쌓아 두면 현직에서 일할 때 도움이 된다. 연봉을 묻자 김진근 위원은 “미국의 A급 오케스트라는 악보 담당 직원의 연봉이 억대다. 중견 오케스트라는 5만 달러(5000여만 원)가량 된다. 한국은 거기에 못 미친다”고 말했다.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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