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이 사람이 사는법]송준섭 박사… 그의 재활치료 포인트는 따뜻한 스킨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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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0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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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축구 대표팀 건강 지킴이 송준섭 박사

낚시 갔다 돌아올 때 어린 송준섭을 업어준 아버지의 넓은 등은 그렇게 따뜻할 수 없었다. 이제 그는 자신의 두 아들에게 그런 넓은 등을 가진 아버지가 되어 주고 싶다. 축구 대표팀 주치의 송준섭 박사가 18일 오후 그가 운영하는 서울 강남구 도곡동 유나이티드병원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낚시 갔다 돌아올 때 어린 송준섭을 업어준 아버지의 넓은 등은 그렇게 따뜻할 수 없었다. 이제 그는 자신의 두 아들에게 그런 넓은 등을 가진 아버지가 되어 주고 싶다. 축구 대표팀 주치의 송준섭 박사가 18일 오후 그가 운영하는 서울 강남구 도곡동 유나이티드병원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유난히 추웠던 1992년 12월, 모처럼 날씨가 풀렸다. 난생처음 가족과 스키장에 가기로 한 날. 화창한 날씨만큼이나 의대 본과 3학년이던 그의 기분도 들떴다.

‘따르릉!’ 정신없이 스키 장비를 챙기던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 너머로 누나가 울먹거렸다. “아빠가 이상하셔.” 스키복 차림으로 한달음에 아버지가 경영하는 약국으로 달려갔다. 아버지의 얼굴은 이미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인근 병원에서 컴퓨터단층촬영(CT) 검사를 했다. 머릿속 출혈이 심했다. 그날 밤 바로 수술을 했지만 피가 멈추지 않았다. 결국 다음 날 2차 수술. 수술실에 들어가면서 아버지는 그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걱정할 것 없다. 그런데 여기는 무척이나 춥구나.” 아버지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고 싶었다

한국 축구대표팀 주치의 송준섭 박사(42·유나이티드병원장). 어린 그에게 아버지는 누구보다 큰 존재였다. 글짓기 대회에서 ‘우리 아버지는 백두산’이란 글을 쓸 정도였다.

약국을 하던 아버지는 정직했다. 대충 약을 지어줘도 될 사람에게 “이건 약 안 먹고도 나을 방법이 있다”는 말을 친절하게 해줬다. 이런 아버지를 두고 어머니는 “어휴, 천사표 약사님 나셨네”라며 핀잔을 주곤 했다.

고교 시절 송준섭은 법대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아픈 사람을 돌보는 것”이라며 의대에 가라고 했다. 아버지는 하늘이었다. 군말 없이 고향 광주에 있는 조선대 의대에 진학했다.

처음 의대에 들어가선 방황을 많이 했다. 노느라 수업을 빠질 때도 많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쓰러진 그날 이후 모든 게 변했다. 2차 수술 뒤 아버지는 식물인간 상태가 됐다. 누나는 방 하나를 병실로 개조해 거기서 매형과 잠을 자며 아버지를 돌봤다. 동생은 서울에 있는 대학에 막 진학한 상황. 송준섭이 실질적인 가장 역할을 해야만 했다.

한편으론 아버지에게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고도 싶었다. 대화조차 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당신의 숨결이 끊기기 전에 자식이 의사로 성공한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 이젠 편히 쉬세요


그래서 서울로 갔다. 좀 더 ‘큰 의사’가 돼 아버지 앞에 서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서울 을지병원에서 인턴, 레지던트 과정을 밟았다. 전공을 고민하다 정형외과로 진로를 결정한 건 한 축구 선수를 치료한 뒤부터. 완치된 환자가 다시 그라운드에 선 모습을 보고는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한 번 목표를 세운 뒤엔 거침이 없었다. 남들 다 “쉬러 간다”던 공중보건의 시절 3년 동안 수술을 1000번 넘게 했다. 그 와중에 시간을 쪼개 전공 공부도 열심히 했다.

그가 흔들렸던 시기는 단 한 번. 한창 전문의 시험을 준비하던 1998년 가을, 아버지가 폐렴 증세로 위독해졌다. 이듬해 1월 시험을 앞둔 그였지만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의사는 “며칠 안에 돌아가실 것 같으니 마음의 준비를 해두라”고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버텼다. 그가 전문의 자격증을 따고 공중보건의가 돼 어느 정도 여유를 되찾을 무렵인 1999년 9월에야 눈을 감았다.

마지막으로 아버지 모습을 보기 위해 광주로 내려갔던 그때…. 그에겐 아직까지 두 가지 장면이 잡힐 듯 눈에 선하다. 하나는 8년 동안 아버지를 돌보느라 30대 젊은 시절을 다 보냈음에도 그렇게 서글피 울던 누나의 모습. 다른 하나는 어느 때보다 편안한 표정으로 누워 계셨던 아버지의 모습이다. 그날 아버지 손을 붙잡고 그는 나지막하게 얘기했다. “아직 더 보여드릴 게 많은데. 그래도 이제 편히 쉬세요.”

○ 나는 대한민국 대표팀 주치의다

온 나라가 들썩인 2002년 한일 월드컵. 월드컵은 송준섭의 인생에서 또 다른 전환점이 됐다. 엄청난 축구 열기에 놀란 한편 태극전사들이 부상에 신음하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웠다. ‘나라면 저 선수들을 치료할 수 있을 텐데.’

이후 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하다 2005년 서울에 개인병원을 개업했다. 병원 운영은 성공적이었다. 환자들이 물밀 듯이 몰려들었다. 당시만 해도 수술과 재활이 원스톱으로 연결되는 시스템이 전무했던 상황. 하지만 그는 두 가지를 결합해 환자들을 치료했다.

그리고 재활 시스템의 중심에 따뜻한 스킨십을 놓으려 노력했다. 아버지가 병상에 있을 때 그는 환자 가족으로서 많은 의사를 접했다. 대부분의 의사가 진료만 한 뒤 돌아섰지만 한 의사는 올 때마다 아버지의 손을 꼭 잡아줬다. “얼굴이 많이 좋아지셨다”는 따뜻한 말을 건네면서. 그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때 결심했다. 의사가 된다면 환자는 물론이고 보호자와도 교감을 나눌 수 있는 따뜻한 의사가 되겠다고.

병원은 잘됐지만 마음 한구석 아쉬움이 지워지지 않았다. 2006년 독일 월드컵을 앞두고 그는 중대 결심을 했다. 병원 문을 닫은 뒤 보수도 받지 않고, 대표팀 주치의 보조로 몇 달 동안 팀을 따라다녔다. 최고 선수들을 관리하는 최고 의료진이 모인 현장에 간 보람은 컸다. 거기서 마음을 굳혔다. ‘대한민국 대표팀 주치의, 더 나아가 대한민국 최고의 정형외과 의사가 되자.’

마침내 기회가 왔다. 그의 노력을 눈여겨본 대한축구협회 의무분과위원장의 추천으로 2007년 대표팀 주치의가 된 것이다. 주치의가 되고 나서는 더 열심히 일했다. 그리고 그 결실은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 나타났다. 송준섭은 대표팀의 ‘건강 지킴이’로 불리며 선수들을 큰 부상 없이 관리해 16강 진출의 숨은 공신이 됐다.

그는 지금도 시간을 분 단위로 나눠 쓸 만큼 정신없이 바쁘다. 그에게 물었다. “이젠 아버지에게 보여줄 만큼 보여드리지 않았냐고.” 사람 좋은 미소와 함께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아들이 둘 있는데요. 나를 닮은 아이들의 얼굴을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해요. ‘이 아이들도 나중에 나를 백두산처럼 듬직하고 자랑스러운 아버지로 기억할까.’ 이런 생각을 하면 쉴 틈이 없죠.”

신진우 기자 nicesh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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