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한류 실핏줄’ 흐른다]<5·끝>아랍문명 원류 이집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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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7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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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잡에 태권도복 그녀들… ‘재스민 혁명’도 한류는 못말려

《 이슬람 지역 여성들은 아무리 날씨가 더워도 반팔 옷을 입을 수 없고, 가족이 보는 때 외에는 머리에 뒤집어쓴 히잡을 벗어서도 안 된다. 이슬람 국가인 이집트도 예외가 아니다. 여성을 바라보는 사회의 통념과 여성들 스스로의 사고방식, 생활도 서구사회에 비해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이집트 여성들이 요즘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열광하는 외국 문화가 바로 ‘한류’다. 》
이집트 카이로 주재 한국대사관 내 한국문화원에서 ‘브라운아이드걸스’의 ‘아브라카다브라’에 맞춰 춤 연습을 하고 있는 이집트 여대생들. 문화원에서 한국어 공부를 하는 이들은 28일 열리는 한국노래자랑대회에 나가 ‘케이팝(K-pop)’ 노래와 안무를 선보일 계획이다.
이집트 카이로 주재 한국대사관 내 한국문화원에서 ‘브라운아이드걸스’의 ‘아브라카다브라’에 맞춰 춤 연습을 하고 있는 이집트 여대생들. 문화원에서 한국어 공부를 하는 이들은 28일 열리는 한국노래자랑대회에 나가 ‘케이팝(K-pop)’ 노래와 안무를 선보일 계획이다.
‘케이팝(K-Pop·한국대중가요)’과 ‘한드(한국드라마)’에 열광하는 층은 대부분 여성으로 소녀부터 중년여성까지 연령대도 다양하다. 회사원 아메니 살레하 씨(29)는 “한국드라마 속 여성들은 남성들에게 지지 않는 독립적인 캐릭터로 나오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모습을 보면서 대리만족을 느낀다”고 했다.

6월 27일 카이로 한국대사관 내 한국문화원. 히잡을 두른 여대생 6명이 머리를 맞대고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이들은 곧 있을 한국노래자랑대회에서 선보일 노래와 춤을 고르기 위해 MP3로 내려받은 케이팝을 들으며 난상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서툰 한글로 쓰인 A4용지를 가득 채운 곡목 중에는 슈퍼주니어, 원더걸스, 소녀시대, 샤이니의 노래를 비롯해 전유나의 ‘너를 사랑하고도’, 심수봉의 ‘사랑밖에 난 몰라’, 김용임의 ‘정선 아리랑’까지 있었다.

여대생들은 미스에이의 ‘배드 걸 굿 걸’이 흘러나오자 손가락을 내세우며 몸을 흔들었고, 원더걸스의 ‘노바디’도 노래와 안무를 그대로 흉내 냈다. 가장 좋아하는 한국 연예인을 묻자 “믹키유천” “소지섭” “권상우” “슈퍼주니어” 등 남자 연예인들 이름이 줄줄 나왔다. 사마르 씨(21·여)는 “한국 남자들은 잘생겼다기보다 예쁘고 귀엽게 생겨 맘에 든다”고 했다.

남성우위 문화가 지배적인 이 나라에서 한국 남자들은 개방적이고 여자 입장을 잘 배려해주는 걸로 통한다. 2009년 12월 카이로에서 열린 한국어말하기대회에 출전한 마리암 씨는 한국 남자와 이집트 남자를 비교하면서 “이집트 남자들은 예비 신부가 음식을 못하면 결혼하지 않는데 한국 남자들은 요리를 잘하든 못하든 상관하지 않아 좋다. 또 이집트 남자들은 집안일을 거의 도와주지 않는데 (드라마 속의) 한국 남자들은 많이 도와준다”고 말했다.

‘한드’에 빠졌다가 한국 요리에 빠진 여성도 많다. 드라마 ‘대장금’을 보고 한국 음식 문화에 푹 빠졌다는 아말 맘두으 씨(35·주부)는 “한식에는 음식을 만드는 사람의 혼(soul)이 담겨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한국문학번역원에서 주최한 독후감쓰기 대회에서 지정 도서였던 이문열의 ‘아우와의 만남’을 읽고 쓴 비평으로 1등을 차지하기도 한 ‘한국문학’ 마니아이기도 하다.

번역가 가다 씨(36)의 가족 식단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끼니마다 한식이 빠지질 않는다. 잡채, 불고기, 김밥, 시금치나물무침, 배추김치, 부침개, 호박찌개 등 메뉴도 다양하다. 1994년부터 이집트 내 한인식당 주인에게서 틈틈이 배운 덕에 재료가 부족한 이집트에서도 맛이 수준급이다. 전을 만들기 위해 능숙하게 계란을 휘젓는 모습, 간장으로 간을 해가며 잡채를 버무리는 모습은 영락없는 한국 주부다. 그의 보물 1호는 한국 친구들로부터 받은 한국 요리책과 레시피들을 스크랩한 자료들. 정성스레 김밥을 말던 가다 씨는 “빵과 치즈만으로 끼니를 때우는 이집트인들에게 한식은 건강식이지만 사 먹기에는 매우 비싼 음식”이라고 말했다.

일찍이 ‘태권도 한류’가 뿌리 내린 이집트에는 ‘사커 맘’ 대신에 ‘태권도 맘’이 있다. 자녀들에게 도복을 입히고 띠를 매줘 도장에 들여보낸 뒤 수업이 끝날 때까지 도장 앞을 지키고 서있는 이집트 아줌마들의 모습은 흡사 서울 강남 대치동 학원가의 한국 어머니들을 연상케 한다. 카이로에 있는 마디클럽스포츠센터 내 태권도장에서 만난 모나 씨(37)는 “태권도를 배운 뒤 태도가 점잖게 변한 아들을 보고 주변 아줌마들이 자기 아이들에게도 태권도를 가르쳐야겠다고 난리”라고 말했다. 도장에서 만난 다른 아줌마들은 자녀들이 세계대회에서 딴 메달들을 보석함에 넣고 다니며 아이 자랑에 열심이었다.

태권도 맘을 하다 선수가 된 아줌마들도 있다. 이달 29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리는 ‘세계태권도 품새 선수권대회’에 ‘51세 이상 여성 부문’에 출전하는 나디아 씨(54)는 “내 또래 여성들이 태권도를 통해 자기 관리를 하면서 한국의 정신문화를 익힐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축복”이라고 말했다.
▼ 민주화 시위중에도 “한국 민주주의 배우자” ▼


지난해 중동지역 최초로 이집트 수도 카이로에 있는 국립도서관 5층에 문을 연 한국자료실 ‘윈도 온 코리아’를 찾은 이집트인들이 한국 책을 찾아 읽고 있다.
지난해 중동지역 최초로 이집트 수도 카이로에 있는 국립도서관 5층에 문을 연 한국자료실 ‘윈도 온 코리아’를 찾은 이집트인들이 한국 책을 찾아 읽고 있다.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은 30년간 이 나라를 철권 통치했던 호스니 무바라크 전 대통령이 물러난 지 6개월여가 지난 요즘도 매주 금요일 시위 참가자들로 북적인다. 불안과 두려움이 팽배했던 과거 시위와는 많이 다르다. 경찰은 자취를 감췄고 사람들은 그동안 쌓여있던 불만을 자유롭게 표출하고 있다. 무함마드 사브르 이집트국립도서관장은 “독재자가 물러났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사회가 안정되길 바라는 건 지나친 욕심”이라며 “1987년 민주화 운동을 거친 한국도 과도기 후유증을 잘 알지 않는가”라고 되물었다.

민주화 변혁기에 있는 이집트 지식인들 중 상당수는 한국을 벤치마킹의 대상이자 닮고자 하는 모델로 꼽는다. 광장과 대학 등에서 만난 지식인들은 한국의 민주화 과정을 잘 알고 있었다. 현재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눈부신 경제성장을 발전 모델로 삼아야 한다는 얘기를 많이 했다.

이집트 태권도 품새 국가대표팀 코치인 웨삼 씨(33)는 “몇 년 전 한국을 방문해 6개월 정도 체류하면서 1960년대 한국 재건 과정에 관심을 갖게 됐다”며 “민주주의를 이뤄가며 경제발전을 이룩한 한국을 보며 이집트도 지금은 혼란스럽지만 언젠가는 업그레이드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강조했다.

이집트에서의 한국어 열풍은 올봄 민주화 시위 과정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2002년 개설된 주이집트 한국대사관 한국어강좌는 본래 올해 2월 개강 예정이었지만 민주화 시위로 3월 21일 개강했다. 이집트 전역에 통금령이 내려졌던 때라 지원서 접수를 나흘밖에 하지 않았는데도 무려 400여 명이 몰려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지난해 6월 이집트국립도서관에는 한국자료실이 문을 열었다. 이집트는 물론이고 북아프리카 중동 지역 전체에서 특정 국가 자료실이 문을 연 것은 한국자료실이 처음. 이곳에는 한국 관련 장서 4000여 권과 CD 2000개 등이 구비되어 있으며 향후 5년간 매년 200권(400만 원어치)의 한국 관련 도서가 추가된다. 도서관의 장서담당 총책임자인 제인 압둘 하디 국장은 “민주화 격동기를 거치면서 이집트인들이 한국에 대해 갖는 관심이 더욱 높아지고 있다”며 “도서관의 한국 도서들을 통해 한국의 진면목을 공부하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중동 아프리카 지역에서 최초로 한국어학과가 개설된 카이로의 아인샴스대도 지적 한류 열풍을 느낄 수 있는 곳. 이집트 최고 어문대학이 있는 이곳은 2005년 한국 국제교류재단과 공동으로 한국어학과를 개설해 2009년 1회 졸업생 28명을 배출했다. 졸업 논문 주제들도 ‘한국의 3·1운동과 이집트의 1919혁명 비교 연구’ ‘김동인 소설 감자를 통해 본 한국 식민지 시대 문학 비교’ 등 전문적이며 깊이가 있다.

이 학과에는 특히 여학생이 많다. 한 학년 재학생 25∼30명 중 여학생이 20∼25명으로 압도적이다. 남학생들이 취업을 위해 한국어를 배운다는 목적이 뚜렷하다면 여학생들은 드라마나 노래 같은 한국 문화에 빠져 한국어를 배우는 ‘순수파’가 많다고 한다. 이렇다 보니 여학생들 중에는 더 깊이 있게 한국어, 한국문학을 공부하고 싶어 한국 유학을 결심하는 경우도 있다. 1년 전 학부를 졸업하고 대학원 과정에 재학 중인 알레 씨(21)는 올 9월 고려대 대학원에 진학해 한국문학을 공부할 계획이다.

취업난에 허덕이는 이집트 젊은이들에게 ‘한류’는 직업을 구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이기도 하다. 한국어과 4학년 남학생들은 삼성전자나 LG전자, 현대자동차와 같은 한국계 기업에 취직을 하거나 한국문학을 아랍어로 번역하는 일에 종사하고 싶어 한다.

졸업 후 삼성전자에 취업한 사라 씨(22)는 후배들의 롤 모델. 회사도 다니면서 학업과 강사를 병행하고 있는 맹렬 여성이다. 회사일이 끝나면 대학원도 다니고 1, 3학년 후배들에게 한국어도 가르친다. 사라 씨도 9월 서울대 언어학 석사과정에 입학해 한국음운론과 음성학을 공부할 계획이다.

이 나라 최고 관광산업 인재를 키우는 헬완대 관광학부는 2009년 9월 한국어를 제2외국어 과목으로 채택했다. 한국어보다 먼저 이집트에 상륙한 중국어와 일본어는 아직 제2외국어로 채택되지 않았다.

카이로 한국대사관 내 한국문화원에는 기차로 일주일에 두 번, 왕복 3∼4시간이나 걸리는 거리에도 아랑곳없이 한국어를 배우러 오는 열혈 학생이 여러 명 있다. 한국어 관광가이드를 하는 메드하트 씨(35)는 “교과서가 별로 없다 보니 책 한 권을 다 떼고도 보던 책만 반복해서 보는 경우가 많았다”고 전했다.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 하는 이집트인들을 위해 한국어를 체계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시스템이 확충됐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높다.

카이로=신나리 기자 journa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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