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핫 피플]프로레슬러 마초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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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5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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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90년대 링위의 카리스마, 열정-쇼맨십 남기고…

“오∼예!”

쇠를 가는 듯한 허스키한 목소리. 다소 느끼하지만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표정. 한 손은 배꼽 언저리에, 다른 한 손은 하늘을 가리키는 야수 같은 몸동작. 독특한 선글라스와 형형색색의 화려한 스카프. 1980, 90년대 국내를 뜨겁게 달군 미국 프로레슬링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기억할 만한 이 남자. 프로레슬링 스타 ‘마초맨’ 랜디 새비지(본명 랜디 마리오 포포·59)다.

1973년 데뷔한 새비지는 1980년대 중반 ‘마초맨’이란 별명으로 불리며 미국 프로레슬링 WWF(지금의 WWE)를 대표하는 스타가 됐다. 그는 엄청난 거구도, 조각 같은 ‘꽃미남’도 아니었다. 터질 듯한 근육이나 화려한 기술도 없었다. 하지만 팬들은 그의 넘치는 열정과 광기 어린 카리스마에 매료됐다. WWF 챔피언 벨트를 두 차례나 차지하는 등 레슬러 경력도 화려했지만 마초맨의 진정한 매력은 인간미에 있었다. 그는 선악을 수차례 오간 ‘애증의 영웅’이었다. 프로레슬링을 통해 만나 실제 결혼까지 골인한 WWF의 ‘퍼스트 레이디’ 미스 엘리자베스(본명 엘리자베스 휴렛·2003년 약물 과다 복용으로 사망)와의 러브 스토리는 미국인들의 심금을 울렸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젠 링 밖에서조차 그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됐다. 새비지는 21일 미국 플로리다 주 템파의 한 고속도로에서 자신의 지프를 몰다 중앙 분리대를 넘어 나무와 충돌해 숨졌다.

현역 시절 새비지의 대표적인 라이벌은 두 명. 헐크 호건(본명 테리 볼레아·58)과 얼티밋 워리어(본명 제임스 브라이언 헬위그·52)다. 이들과의 인연을 통해 프로레슬러 ‘마초맨’의 삶을 다시 한 번 조명해 봤다.

○ 호건: 애증이 교차하다

헐크 호건. 프로레슬링 사상 가장 성공한 레슬러이자 최고 인기를 누린 남자. 온화한 옆집 아저씨 같은 이미지이지만 링에만 오르면 그로기 상태에서도 벌떡 일어나 상대를 제압하는 무적의 사나이. 거기에 ‘아메리칸 히어로’란 이미지까지 가졌던 호건은 동시대 스타인 새비지를 ‘영원한 2인자’로 밀어냈다. 새비지가 그토록 아꼈던 첫 번째 세계챔피언 타이틀을 뺏은 사람이 바로 호건이었다. 이후 새비지는 호건의 벽을 넘지 못했다. 호건이 약물파동으로 경기에 나오지 못했을 때 또 하나의 WWF 챔피언벨트를 따냈을 뿐이다.

그렇다고 호건과 새비지가 항상 대립하진 않았다. 이들은 함께 ‘메가 파워스’란 팀을 결성해 최고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새비지의 연인 엘리자베스를 사이에 두고 오해가 생겨 팀을 해체했고, 갈등의 골이 깊어졌다.

2004년 프로레슬링 무대를 은퇴할 당시 새비지는 이런 말을 했다. “레슬링에 대한 열정과 쇼맨십에서 호건은 역대 최고다. 하지만 그에게 존경만 표시할 순 없었다. 내 앞에 그가 있었기 때문이다.” 은퇴 이후 새비지는 랩 앨범을 내기도 했는데 제목이 ‘(호건) 인간이 돼라!’였다.

10년 넘게 대화 한 번 나누지 않았던 이들은 공교롭게도 새비지가 사망하기 얼마 전 재회했다. 호건은 새비지의 사망 소식을 전해들은 뒤 이렇게 말했다. “난 정말 망연자실했다. 불과 몇 주 전 우리는 대화를 나눴고, 다시 친구가 됐었다. 그가 더 행복하고 좋은 곳에 있길 기도한다. 그가 그립다.”

○ 워리어: 최고의 승부를 펼치다

1991년 3월 WWF ‘레슬매니아 7’이 열린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스포츠아레나. 건장한 두 남자가 잡아먹을 듯 서로를 노려봤다. 이른바 ‘커리어 매치(career match)’. 이 경기에서 패한 사람은 영원히 링을 떠나야 한다. 공이 울리고 프로레슬링 역사상 길이 남는 명승부가 펼쳐졌다. 1시간 가까이 진행된 대혈투. 승자는 워리어였다. 새비지는 한동안 링 위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새비지는 은퇴 후 한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선수’로 주저 없이 워리어를 꼽았다. “존재감만으로 경기장을 진동시킨 선수는 딱 두 명, 호건과 워리어였다. 하지만 호건도 워리어의 폭발적인 에너지를 따라갈 수 없었다.”

실제 워리어는 대단했다. 현란한 페이스 페인팅, 구릿빛 피부와 터질 듯한 근육, 전력으로 링까지 뛰어와 로프를 흔드는 폭발적인 에너지는 보는 이들을 흥분시켰다. 그런 워리어가 꼽은 ‘최고의 매치’는 다름 아닌 새비지와의 경기였다. 최근 워리어는 한 인터뷰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긴장했던 경기는 호건이 아닌 새비지와의 승부였다”면서 “아직까지 동작 하나하나가 머릿속에 생생하다. 그 경기를 생각하면 여전히 피부가 곤두선다”고 했다.

새비지 사망 소식을 들은 뒤 워리어도 인터뷰를 통해 애도를 표했다. “마초맨은 내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미칠 듯한 힘의 원천이었다. 그와 경기를 한 건 행운이었다. 그와의 추억에 감사한다.”

신진우 기자 nicesh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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