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건축을 말한다]<6>정기용의 정읍시 ‘기적의 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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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2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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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은 밋밋한데 풋풋한 사람냄새가…

“건축가 일방적인 디자인보다
사람들 눈높이 맞춰 설계해야”
‘골방열람실’ 등 주민요구 반영

전북 정읍시 ‘기적의 도서관’ 외형에는 특별한 구석이 없다. 하지만 콘크리트 벽체 안쪽에는 “땅과 사람을 번역해 공간을 만든다”는 설계자의 배려가 가득하다. 사진 제공 기용건축사사무소
전북 정읍시 ‘기적의 도서관’ 외형에는 특별한 구석이 없다. 하지만 콘크리트 벽체 안쪽에는 “땅과 사람을 번역해 공간을 만든다”는 설계자의 배려가 가득하다. 사진 제공 기용건축사사무소
15일 오전 전북 정읍시 수성동 ‘기적의 도서관’ 앞에 카메라를 들고 선 기자는 처음 ‘낭패다’라고 생각했다. 정기용 성균관대 교수(64)가 설계한 노출콘크리트 2층 건물. 구석구석 살피며 한 바퀴 빙 둘러 걸어봤지만, 땅에 바짝 엎드린 밋밋한 건물 밖 어디서도 그럴듯한 사진을 얻기 힘들어 보였다. 그러나 1시간 남짓 내부를 거닌 뒤에는 계속 머무르며 책을 한 권이라도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요란스럽게 붙은 간판과 게시물을 잊고 찬찬히 뜯어본 그 공간에는 마음을 붙드는 따뜻한 ‘배려’가 있었다.

“상상력을 발휘해서 보기만 좋게 지은 건물의 가치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건축물은 주어진 터와 거기서 살아갈 사람의 ‘관계맺음’을 위해 만들어지는 공간 인프라죠. 외형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정 교수의 건축물이 가진 모양새가 볼품없지는 않다. 전남 순천시, 경남 진해시, 제주 제주시와 서귀포시에 앞서 세운 어린이 도서관,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복합 문화시설 코리아나 스페이스C 등은 곳곳에 미대 출신다운 은근한 세련미가 숨어 있다. 이날 오후 서울 종로구 소격동 사무실에서 만난 정 교수는 “미술은 학비가 아쉬워서 공부한 것”이라고 했다

“중학교 때 공짜로 켄트지를 준다기에 미술부에 들었습니다. 제법 잘 그린다는 얘기를 믿고 미대에 갔죠. 그런데 데모로 밥 먹듯 휴교하는 학교 근처를 빙빙 돌면서 영화나 보고 다니다가 ‘세상이 절박한데 미술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회의가 들었어요. 재주가 부족한 탓이었겠죠.”(웃음)

일찌감치 미술에 애정을 잃고 이리저리 한눈팔다 만난 두 건축가가 그의 인생을 바꿨다. 당시 학장이었던 조각가 김세중과의 친분으로 1년간 강의를 나온 김수근에게서 건축이라는 학문을 처음 알았다. 그 뒤 닥치는 대로 건축 책을 찾아보다 19세기 영국 디자이너 윌리엄 모리스의 자서전을 읽고 마음을 굳혔다.

1층 무지개방의 골방열람실. 도서관 곳곳의 골방은 어린 시절 다락방 독서의 즐거운 기억을 닮은 공간이다. 정읍=손택균 기자
1층 무지개방의 골방열람실. 도서관 곳곳의 골방은 어린 시절 다락방 독서의 즐거운 기억을 닮은 공간이다. 정읍=손택균 기자
“모리스는 ‘충만감을 얻을 수 있는 노동을 할 것, 사회적 부의 분배를 도울 것, 환경의 질을 높이는 데 이바지할 것 등 세 가지를 삶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건축을 통해 아름다움을 나눌 수 있다면 근사한 삶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마(窯) 당번이 받는 조교지원금을 노리고 대학원에 진학해 도예를 전공했지만 졸업 때는 작품보다 논문에 정성을 쏟았다. 주제는 ‘세계 도자 비교론: 도자기란 무엇인가’인데 결론은 ‘앞으로 건축을 공부하겠다’가 됐다. 물건을 담는 그릇이던 도자기가 세월이 흐르면서 감상을 위한 예술품으로 변한 현상을 비판한 내용이었다.

“도자기는 빈 공간을 만들어 뭔가를 담기 위해 생겨났는데 차츰 그런 기능을 잃고 본질에서 멀어졌죠. 표면을 곱게 만들기 위해 고안한 유약은 원래 재료인 흙으로 돌아갈 수 있는 성질을 없앴고요. 경쟁적으로 화려한 형상을 만드는 데 몰두하는 요즘의 건축에 대해서도 그와 비슷한 걱정이 듭니다.”

건축가가 일방적으로 디자인하는 건축에 반대하는 그의 견해는 정읍 도서관의 설계 과정에도 반영됐다. 정 교수는 “이 건물은 몇 년 전부터 공동체 도서관을 꾸리고 있던 동네 아주머니들에게 배운 대로 설계한 것”이라며 “건축가가 한 일은 원래 거기 있었던 사람들의 요구를 공간으로 번역한 것이지 그 땅에 없던 뭔가를 새로 창조한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내부를 노랗게 칠한 1층 영유아방에서 만난 주부 김미숙 씨(36)는 13개월 된 둘째 경민이를 무릎 앞에 누이고 앉아 독서를 즐기고 있었다. 김 씨는 “아기를 보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 줄 걱정 없이 책을 맘껏 읽을 수 있어서 시간 날 때마다 들른다”고 말했다. 책을 깨끗이 보도록 현관 바로 옆에 배치한 세면시설, 조용히 숨어서 책을 읽을 수 있는 골방열람실도 주민들에게서 얻은 아이디어다.

정 교수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해 을지로 국립도서관과 한국은행 뒤 시립도서관에서 검정고시 공부를 했다. 그때 얻은 ‘세상의 수많은 책’에 대한 전율이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다고 믿는다. 그리고 좋은 책을 양껏 읽으며 자라나는 지금의 아이들이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어 주리라 믿고 있다.

정읍=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원대연 기자
원대연 기자
●정기용 교수는…

△1968년 서울대 응용미술학과 졸업, 1971년 동대학원 석사 △1975년 프랑스 파리 국립고등장식미술학교(ENSAD) 실내건축과, 1978년 6대학 건축과, 1982년 8대학 도시계획과 졸업 △1986년 기용건축사사무소 대표 △2004년 이탈리아 베니스 비엔날레 건축전 한국관 커미셔너, 한국건축가협회상(전남 순천 어린이도서관) △2007년 성균관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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