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의 즐거움 20선]<11>백두대간 가는 길

  • 입력 2009년 8월 10일 02시 59분


《“한반도의 뼈대로 불리는 백두대간(白頭大幹)은 그 굵은 산줄기와 산이 낳은 물줄기를 통해 우리의 삶과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왔다. 백두대간은 우리의 문화와 역사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지금의 백두대간은 단순한 종주의 대상으로 전통적 지리 개념을 확인하는 차원에 머물고 있다.”》

백두대간, 사연없는 골짝이 없네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강이나 계곡을 건너지 않고 이어진 산줄기다. ‘백두’는 백두산의 ‘백’자와 지리산의 다른 이름인 두류산의 ‘두’자를 땄고, ‘대간’은 ‘큰 산줄기’라는 뜻이다. 금강산, 설악산, 태백산, 소백산, 속리산, 덕유산 등 대부분의 명산이 포함돼 있다.

대학 시절 전문 등반을 시작한 저자는 잡지 ‘사람과 산’ 편집장을 거쳐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1997년 파키스탄 히말라야의 낭가파르바트(8125m)를 등반했다. 서문에 “백두대간을 터전으로 수천 년에 걸쳐 이뤄낸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점을 뒀다”고 적었다.

이 책은 남녘 끝 경남 산청군 중산리에서 출발해 강원 인제군 향로봉까지 총 640km에 걸친 답사기다. 휴전선 아래 백두대간 24개 구간마다 역사와 관련 인물, 마을 이야기, 전설 등을 조목조목 일러준다. 각 챕터의 끝에는 루트를 그린 30만분의 1 축척 지도와 산행정보, 숙박시설, 별미를 두 쪽에 걸쳐 소개했다.

1구간 지리산은 경남 함양 하동 산청, 전남 구례, 전북 남원까지 3도 5개 시군에 걸쳐 있다. 지리산은 영호남이 어울리는 장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산길, 물길, 장시(場市)를 통해 서로 어울렸고, 노고단과 천왕봉을 중심으로 한민족 고유의 산신 신앙을 통해 하나가 됐다.

저자는 산을 사랑한 선조들이 남긴 기록도 되짚어 봤다. 조선 중기 남명 조식(1501∼1572)은 지리산에 매료돼 열두 차례나 올랐다. 이곳을 학문 탐구의 이상향으로 여기고 말년을 보낸 까닭에 주변에 덕천서원, 산천재, 남명 묘소 등 관련 유적지가 많다. 그는 지리산의 아름다움을 ‘두류산가’에 응축시켰다. ‘두류산 양단수를 예 듣고 이제 보니/도화 뜬 맑은 물에 산영조차 잠겼어라/아희야. 무릉이 어디요 나는 여긴가 하노라.’

크고 넉넉하다는 뜻의 덕유(德裕)산은 4구간이다. 난리가 날 때마다 민초들이 숨어들어 화를 피할 수 있었기에 붙은 이름이다. 저자는 즐겨 산에 올랐던 갈천 임훈(1500∼1584)이 52세 때인 1552년 덕유산을 오른 뒤 쓴 ‘등덕유산향적봉기(登德裕山香積峰記)’를 들춰 보는 것으로 시작해 거북을 닮은 바위 ‘수승대’에 얽힌 사연, 근처 강천리 강동마을에 있는 동계 정온(1569∼1641)의 고택, 무주 구천동의 반딧불이와 백련사까지 돌아본 뒤 다음 구간으로 떠난다.

9구간은 늘재를 지나 청화산, 대야산, 희양산, 백화산을 거친다. 늘재는 조선의 빼어난 인문지리학자 이중환(1690∼?)이 저서 ‘택리지’에서 ‘금강산 남쪽에서는 으뜸가는 산수’라고 격찬한 곳이다. 부드러운 능선과 날카로운 암릉이 섞인 청화산을 지나 깎아지른 암봉이 치솟은 대야산, 제법 가파른 희양산에 오른다. 저자는 희양산 남쪽, 문경의 가은고을에서 후삼국시대 견훤과 만난다. 견훤의 고향인 이곳은 1970년대만 해도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탄광촌이었으나 1994년 마지막 광업소가 문을 닫으면서 내리막길을 걸었다.

두타산과 청옥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만든 무릉계곡에서 김지하 시인의 ‘너럭바위·1’을 읊고, 양양 남쪽 해안에 있는 하조대에서는 한 남자를 사랑한 두 자매의 슬픈 전설을 들려준다. 백두대간 남녘 구간의 끝은 통일전망대다. 해금강, 말무리 반도, 백바위…. “모두 직접 다리품 팔아 가고픈 북녘의 산하다. 그날이 오면, 통일이 되면….”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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