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의 역사]<9>서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 입력 2009년 9월 9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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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건너편에서 바라본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이 아파트는 1976년 준공 당시부터 지금까지 ‘고소득층 아파트의 상징’ 자리를 지켜 왔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한강 건너편에서 바라본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이 아파트는 1976년 준공 당시부터 지금까지 ‘고소득층 아파트의 상징’ 자리를 지켜 왔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한강변 개발, 강남 시대를 열다

《아파트는 1960년대 이후 경제성장에 힘입어 새롭게 쓰인 ‘서울 공간 역사’의 주인공이다. 현재 서울 전체 주택의 약 55%가 아파트이고, 새로 짓고 있는 주택의 80% 정도가 아파트다. 현대 서울의 역사는 아파트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96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아파트 건설의 역사는 곧 한강 개발의 역사다. 인구가 집중되면서 주거시설이 늘고 도시가 팽창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강남’이라고 불리는 영동지구를 중심으로 도시 성장과 변화의 물결이 한강변을 따라 퍼져나갔다. 아파트는 고도의 경제성장과 공간 팽창을 널리 알리는 상징으로 작용했다. 엘리베이터와 수세식 화장실을 갖춘 고층 아파트는 성장의 흔적을 압축적으로 보여줬다.》

한강 공유수면 매립… 고급아파트의 대명사 자리매김
80년대 후반 로데오거리, 젊은층 소비 욕망의 해방구

1968년 용산구 동부이촌동을 시작으로 거대한 아파트군(群) 여럿이 한강을 따라 강남지역에 대대적으로 건설됐다. 1969년 만든 한남대교와 1970년 개통한 경부고속도로는 영동지구 개발과 아파트 건설의 속도를 더했다. 1975년 강남구가 탄생했고, 1976년에는 반포동 압구정동 청담동 도곡동이 ‘아파트 지구’로 지정됐다. 한강 이북의 고등학교들이 강남 쪽으로 옮겨가면서 1973년 5만3000여 명이었던 영동지구 인구가 1978년에는 21만6000여 명으로 증가했다. 영동지구가 점점 시가지의 면모를 갖추면서 한강변과 경부고속도로에 인접한 압구정동은 강남의 노른자위 땅으로 급부상했다. 현대건설이 경부고속도로 공사 대금으로 받은 압구정동의 한강 공유수면(公有水面·국가 소유의 수면)을 매립해 중대형 위주의 고급 민영아파트 단지 건립을 추진한 것이 바로 이 즈음이다.

압구정동 현대아파트는 혁신적인 디자인이나 고급스러운 시설을 도입한 건물이 아니다. 이곳이 한국에서 손꼽히는 고급 아파트 단지로 자리 잡은 것은 1978년 7월의 특혜분양 사건 때문이었다.

당시 건설사는 ‘50가구 이상의 주택을 건설하는 사업자는 공개 분양해야 한다’는 주택건설촉진법을 무시하고 건설한 아파트의 상당수를 정부 관리, 국회의원, 대학교수 등 고위급 인사들에게 주변 집값의 50% 수준으로 특혜 분양했다. 분양과 동시에 약 5000만 원의 프리미엄이 형성됐다. 분양가는 3.3m²당 44만 원. 5000만 원은 당시 현대아파트 115m² 1채의 분양가에 해당했다.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이 사건은 오히려 ‘압구정동 현대아파트’를 ‘고급 아파트’의 대명사처럼 각인시키는 계기가 됐다. 160m² 이상의 대형 아파트를 국내에 처음으로 선보인 이 아파트 이후 건설회사의 이름을 따른 아파트 이름이 유행처럼 늘어났다.

1980년대 후반에는 현대아파트를 중심으로 압구정동 고소득층 주거지에 커다란 문화적 변화의 물결이 일었다. 해외로 조기유학을 떠났던 ‘압구정 키드’와 함께 미국 교포 2세들이 모여들면서 이곳은 젊은이들이 소비적 욕망을 분출하는 해방구가 됐다. 명품 거리의 시초라 할 수 있는 로데오 거리가 형성되고 ‘오렌지족’이라는 신세대가 등장했다.

세월이 흘렀다. 명품 거리는 청담동으로 쏠려 갔고, 압구정동 한편을 메웠던 학원가는 대치동으로 이동했다. 비워진 거리에는 줄이어 세워진 성형외과들이 여성들을 유혹하고 있다. 한국 사회 일상의 욕망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이 지역의 변화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 궁금하다.

1976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3000달러를 넘지 못했던 시기에 지어져 고소득층 아파트의 상징이 된 압구정동 현대아파트는 30여 년이 흐른 지금도 국내에서 가장 비싼 아파트 가운데 하나다. 서울시의 한강변 정비 계획과 강변 아파트 촉진 계획에 따라 재건축 논의가 한창인 이곳은 앞으로 어떤 변화를 맞을까. 그 향방에 따라 한강변의 풍경 전체가 크게 달라질 것이다.

재건축을 통해 더 크고 높은 콘크리트 장벽을 한강변에 쌓아 올리려는 욕망이 도시 곳곳에 꿈틀거리고 있다. 하지만 한강은 서울시민 모두가 즐길 수 있는 공공 자산으로 남아야 한다. 한강변 아파트 재건축의 핵심은 민간 영역의 사업에 도시 공간의 공공성에 대한 책임감을 얼마나, 어떻게 지우느냐에 달려 있다.

이영범 경기대 건축대학원 교수

※⑩회는 장윤규 국민대 교수의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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