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길]<20>경제개발의 길목에서

  • 입력 2009년 4월 23일 02시 58분


1976년 12월 부가가치세가 도입돼 통행세 전기가스세 석유류세 등 간접세가 부가가치세로 흡수 통합됐다. 국세청 간부들을 만나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왼쪽). 동아일보 자료 사진
1976년 12월 부가가치세가 도입돼 통행세 전기가스세 석유류세 등 간접세가 부가가치세로 흡수 통합됐다. 국세청 간부들을 만나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왼쪽). 동아일보 자료 사진
<20>부가가치세 도입

재무부 장관 재직 당시의 간접세제는 세금 종류에 따라 과세 기준과 과세 방법이 다양하고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특히 영업세는 세무공무원이 업체의 영업 실적을 실사해 이윤을 산정하고 그에 대해 일정률의 세금을 부과하도록 돼 있는데, 장부나 거래기록이 없는 중소기업이나 영세사업자의 영업 실적과 이윤을 산정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세무공무원의 주관적 판단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인정과세는’ 조세 마찰의 주요인이 되고 있었고 국회에 나갈 때마다 정치공세의 표적이 됐다.

나는 유럽국가에서는 모든 간접세를 부가가치세로 통합했다는 것을 어떤 잡지에서 읽은 일은 있었으나 그 구체적 내용은 잘 모르고 있었다. 어느 날 김재익 비서관에게 유럽의 부가가치세를 아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모든 거래 단계마다 부가가치가 발생하므로 그 일정률을 세금으로 흡수하는 제도”라고 답했다. 그러면 각 거래단계의 부가가치를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모든 거래에서 영수증을 받도록 의무화하고 영수 금액의 일정률을 세금으로 징수하면 그것이 바로 거래에서 발생하는 부가가치의 일부가 된다는 말이었다. 사업자, 특히 영세상인들이 영수증을 주고받는 것이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직감했지만 부가가치세를 도입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정답이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 문제는 그것을 언제 어떻게 도입하느냐였다.

나는 생각 끝에 실무자들을 유럽공동체(EC)에 파견해 실상을 파악하고 그들의 경험을 참고하기로 했다. 그래서 1974년 여름 최진배 세제국장, 강동구 국세조사과장, 김재익 박사, 서강대 교수인 김종인 박사 등 4명을 EC 지역에 파견하기로 했다. 그들이 직접 가서 보고 이 세제 도입을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하고 시행상의 어려움이 무엇인지를 알아 오라고 지시했다.

그들이 돌아와 나에게 복명하는 것을 자세히 들었는데 그중에서 가장 주요한 것은 각종 물품에 차등 세율을 매긴 것이 EC의 큰 잘못이었으니 한국에서는 단일 세율로 하고 세율은 계산하기 쉬운 숫자를 택하라고 권고하더라는 것이었다. 내가 10%의 단일 세율을 선호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런데 실무자인 최 국장 및 강 과장과 나머지 두 박사는 도입 시기를 놓고 의견이 달랐다. 두 학자는 조속히 입법 조치를 취해 새 제도를 시행한 다음 미비점을 보완해 가면 될 것이라고 했고, 두 실무자는 이 제도를 실시하려면 먼저 납세자의 이해를 구하면서 영수증 제도를 확립하는 동시에 세무공무원을 훈련시키는 데에 충분한 준비기간이 필요하다는 의견이었다. 나는 상반된 의견을 충분히 들은 다음, 배도 세정차관보의 의견에 따라 금년 중에 법안을 만들고, 내년 정기국회에 상정해 1976년부터 시행하도록 하라며 실무자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나 나는 그 직후인 9월에 재무부 장관 자리에서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자리를 옮기게 돼 부가가치세 도입 과업을 후임자인 김용환 장관에게 인계하게 됐다. 김 장관은 치밀한 준비과정을 거쳐 1976년 12월 세제 개편의 일환으로 부가가치세 도입에 성공했고 그 결과 종래의 통행세 입장세 전기가스세 물품세 석유류세 직물류세 유흥음식세 영업세 등 간접세가 부가가치세로 흡수 통합됐다. 차등세율을 피해야 했지만 경제적 성역(聖域)인 수출용 원자재에 대해서는 0세율을 적용했다.

부가가치세 도입에 어려움도 많았지만 그것은 과세의 투명화와 공평성을 위해 필요불가피한 시책이었다. 오늘날 부가가치세는 정부 조세수입의 약 35%를 차지해 정부 세입(歲入)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전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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