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테마 에세이]커피<1>한유주

  • 입력 2009년 10월 2일 02시 4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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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신다, 고로 존재한다

‘나는 커피를 마신다, 고로 존재한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일어나자마자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잠이 영원히 물러가지 않을 것 같은 상태가 된다. 식전에도 식후에도, 무언가를 읽거나 쓰면서도, 누군가를 만나거나 헤어질 때도, 커피는 항상 곁에 있어야 한다. 내게 커피는 어느 순간, 기억이나 추억을 넘어서서, 일상을 견디는 수단이 되었다.

어릴 적, 커피는 아이들이 마시면 안 되는 음료였다. “커피 마시면 밤에 잠도 못 자고 키도 안 큰다”라는 어른들의 말을 몇 번인가 들었던 기억이 있다. 부모님은 두 분 모두 흔히 다방커피라 불리는 달디 달고 쓰디 쓴 갈색의 액체를 매우 좋아하셨다(지금도 마찬가지다). 커피 심부름을 할 때마다 호기심에 커피 맛을 보고는 했지만 어린 나에게 커피는 말 그대로 달기만 하고 쓰기만 했다. 그때는 오늘의 내가 이토록 커피를 마셔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중학생이 되어 시험공부를 한다는 핑계를 대고 친구들과 독서실 근처를 어슬렁거릴 때였다. 누군가가 자판기 커피를 뽑아왔고 우리는 그것을 돌려 마셨다. 그때 다른 친구가 말했다. “커피 마시면 엄마한테 안 혼나?” 커피를 뽑아온 친구는 종이컵 위로 입김을 불며 대답했다. “아니.” 당시 그 친구의 어머니는 돌아가신 지 오래였다. 가을이었다. 다음 날부터 중간고사가 시작될 예정이었다. 카페인 성분에 내성이 없던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 앉아 책상 위의 낙서들을 밤새 들여다보았다.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 난 뒤, 커피는 더는 금지된 음료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일말의 죄책감을 갖게 하는 음료가 되었다. 나는 언젠가부터 기호식품이라 불리는 것들에 모두 중독되고 말았고, 내가 소비하는 기호식품들이란 그다지 윤리적이지 못한 이동경로를 따라왔던 것이다. 커피를 마실 때마다 나는 내가 마시고 있는 커피의 기원을 헛되이 추적해보는 버릇이 들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좀 더 풍요로운 맛과 색과 향을 지닌 커피를 바라면서도,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졸음에 겨워 견딜 수 없으면서도, 그래서 종일 커피를 마시면서도, 커피를 마시는 일은 언제나 묘한 부끄러움을 동반한다.

그 부끄러움을 가끔 잊을 때가 있다. 누군가를 만날 때, 그 시간은 한 잔의 커피로 수렴된다. 누구나 커피를 마시고, 누구와도 커피를 마신다. “커피 마실까.” “좋지.” 그렇게 커피를 마실 때, 커피는 커피가 된다. 그런 때는 오직, 커피의 맛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한유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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