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 이 연구]<2>“사이버소설도 문학” 나은진 교수

  • 입력 2008년 10월 13일 02시 55분


나은진 교수가 10일 서울 이화여대 연구실에서 컴퓨터 화면으로 사이버소설 한 편을 보여주며 사이버소설과 한국문학의 전통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경제  기자
나은진 교수가 10일 서울 이화여대 연구실에서 컴퓨터 화면으로 사이버소설 한 편을 보여주며 사이버소설과 한국문학의 전통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경제 기자
“11년前 PC통신 인기 작품 훑다

‘홍길동전의 전통 계승’ 보았죠”

“문학계에서는 지금도 사이버소설을 질 낮은 ‘하급문화’로 취급합니다. 문학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사이버소설에는 신화와 전설, 민담 등에서 이어진 한국문학의 전통성이 발견됩니다. 이것은 아카데미즘이 안고 가야 할 하나의 문학입니다.”

나은진(41) 이화여대 국어교육과 교수는 문학계에서 ‘가지 말라고 말리던 길’을 가고 있다. 1999년 ‘1950년대 소설의 세 서사 모형 연구-장용학, 손창섭, 김성한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으로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고전적인 문학연구방법론을 공부했다. 하지만 학위 취득 이후 그는 학계에서 ‘외부의 것’으로 취급하는 사이버소설에 대해 ‘한국문학의 전통성을 토대로 도출된 것’이라고 평가하며 제도권 안으로 포함시키려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나 교수가 사이버소설에 주목한 것은 1997년 3월. 당시 이화여대 대학원 박사과정에서 논문을 준비하고 있던 그는 재미삼아 들른 PC통신 게시판을 보다가 개안(開眼) 했다.

조회수 높은 몇몇 작품들을 읽던 그는 예상 밖으로 탄탄한 스토리와 구성에 놀랐다. 좀 더 들여다보니 고대문학에서 발견되는 전통성이 눈에 들어왔다. 가령 이영도의 ‘눈물을 마시는 새’의 경우 동서양이 혼합된 퓨전 성격의 소설로 볼 수 있지만 핵심은 정치지도자가 정책과 국가경영을 통해 이상향을 실현해 나간다는 것.

“게시판에서 인기 있는 소설들을 읽다 보니 과거 홍길동전에서 홍길동이 건설하려 했던 율도국의 이상이 사이버 역사소설 작가들에게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지도교수에게 사이버소설을 한국문학의 범주에서 분석하는 논문을 써보겠다는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당시는 사이버소설의 ‘사’자도 입 밖에 내기 어려운 상황이어서 주위에서 다들 말렸습니다. 그래서 (기존 논문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는) 클래식한 논문을 쓸 수밖에 없었어요.”

박사학위를 받은 후 곧바로 사이버소설 분석에 매달렸다. 제도권 문학 테두리 바깥에서 사이버소설을 분석하는 기존 연구들과 달리 제도권 틀 안에 집어넣는 작업이었다.

2004년 ‘사이버 역사소설에 나타난 정치적 이상향의 담론양식과 그 의미’에 대한 연구로 한국학술진흥재단 신진교수연구과제를 수행한 뒤 연구에 자신감이 붙었다. 2005년에는 다른 교수 4명을 끌어들여 ‘타자성의 환상적 지형과 한국문화의 정체성 형성과정’ 프로젝트를 따내 사이버문학의 ‘환상성’을 고대 근대 현대문학의 환상성과 비교했다.

그의 연구에 대한 학계의 시선은 여전히 곱지 않다. 최근 들어서는 학회에서 발표할 때면 “참신한 시도”라는 평가도 있지만 원로들 중에서는 “지면 낭비” “자꾸 이런 식으로 공부하면 우리 문학의 정통성만 더욱 약해질 뿐”이라는 비판도 많이 나온다고 한다.

10일 이화여대 연구실에서 만난 나 교수는 “그래도 요즘은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며 웃었다. “논문 지도를 맡았던 김상태 교수님도 처음에는 시큰둥하셨지만 요즘에는 사이버문학과 관련된 행사가 있으면 ‘네가 가장 잘 아니까 네가 나가라’고 해주십니다. 남들 안 하는 것을 하다 보니 어느샌가 저만 이걸 하고 있나 보네요.”

황장석 기자 suron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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