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길, 배낭 속 친구가 되어주는 책 30선]<5>먼 북소리

  • 입력 2008년 6월 27일 03시 12분


◇먼 북소리/무라카미 하루키 지음·문학사상사

《“어느 날 아침 눈을 뜨고 귀를 기울여 보니 어디선가 북소리가 들려왔다. 아득히 먼 곳에서, 아득히 먼 시간 속에서 그 북소리는 울려왔다. 그 소리를 듣고 있는 동안 나는 왠지 긴 여행을 떠나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3년의 여행길서 만난 유럽-유럽인

작가는 어느 날 문득 긴 여행을 떠나고 싶어졌다. 여행을 떠나기에 이보다 더 설득력 있는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조금 더 그럴듯한 이유라고 한다면 그가 서문에서 밝힌 대로 “일본에 그대로 있다가는 일상생활에 얽매여서 속절없이 나이만 먹어버릴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그는 키우던 고양이 두 마리를 아는 사람에게 맡기고 아내와 함께 훌쩍 떠났다. 1986년 가을 이탈리아 로마에서 시작한 3년 동안의 여행은 그리스의 아테네와 스페체스 섬, 미코노스 섬을 거쳐 오스트리아로 이어졌다.

그의 여행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여행과는 달랐다. 관광지를 둘러보는 여행이 아니라 한 곳에 몇 달씩 머무르며 현지인처럼 생활하는 것이었다. 작가는 스스로를 “관광객도 아닌, 뿌리를 내리고 사는 사람도 아닌 상주하는 여행자였다”고 규정했다. 그는 낯선 곳에서 맞닥뜨린 이국적 풍경을 특유의 치밀한 시각과 경쾌한 문체로 책에 고스란히 옮겼다.

그리스의 스페체스 섬으로 가는 배를 놓고 그는 “영화 ‘해저 2만 리’에 나오는 노틸러스호처럼 시대에 뒤떨어진 전위적인 스타일에다, 성깔 있는 수생동물처럼 다리를 삐죽 내밀고 바다 위를 질주하는 광경은 기분 나쁘기까지 하다”고 묘사한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축 늘어져 있는 개들을 그리스 곳곳에서 만나자 그는 ‘죽은 개 현상’이라는 이름까지 붙여 이런 현상을 미주알고주알 들려준다.

책은 끝까지 이런 식이다. 여행 정보를 전달하거나 아름다운 풍경을 묘사하는 다른 여행기와는 다르다. 호기심 많은 이방인의 눈에 비친 현지의 일상이 꼼꼼하게 펼쳐질 뿐이다.

여행작가 김남희 씨는 “환상적으로 재미있거나 짜릿한 이야기는 없지만 일상을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풀어내는 하루키의 힘이 느껴진다”며 이 책을 추천했다.

하루키는 조깅을 하는 와중에도 작가로서의 본능을 잊지 않고 주변을 꼼꼼히 관찰했다.

“이탈리아의 조깅족은 꽤 특수한 부류에 속하는 것 같다. 그들은 우선 옷부터 멋있게 갖춰 입는다. 두 번째 특징은 몇 명이 어울려 함께 달린다는 것이다. 혼자 뭔가를 하는 데 익숙하지 않은 것인지, 혼자서는 떠들 수 없으니 그것을 못 참는 건지 판단하기 어렵다.”

한적한 섬의 카페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개와 장난을 치거나 낚싯대를 드리워 놓고 하늘을 감상하는 작가의 모습에서 한가로움이 한껏 느껴진다.

그의 꼼꼼한 성격 덕에 ‘그리스에선 선거일에 전국 어디에서도 술을 팔지 않는다’는 것 같은 색다른 사실을 알게 되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즐거움 가운데 하나다. 그리스인들은 선거에 관심이 많고 흥분을 잘해서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선거일에 술 판매를 법으로 금지한다는 것이다. 긴 여행에서 돌아온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게는 지금도 간혹 먼 북소리가 들린다. 막무가내로 다시 여행을 떠나고 싶어질 때도 있다. 하지만 나는 문득 이렇게도 생각한다. 지금 여기에 있는 과도적이고 일시적인 나 자신이, 그리고 나의 행위 자체가 말하자면 여행이라는 행위가 아닐까 하고.”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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