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 100년-위안의 詩]백석/‘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 입력 2008년 7월 10일 02시 59분


얼마 전, 한 영화기사 인터뷰에서 1930, 40년대 모던보이 주인공 역할을 맡은 배우가 헤어스타일을 고민하던 중 우연히 알게 된 시인 백석의 사진에서 큰 도움을 받았다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이제 제법 백석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처럼 산골에 숨어 있는 것만은 아니구나 싶어서 미소 지은 적이 있다.

아마도 시를 쓰는 사람치고 ‘재 위에 뜻 없이 글자를 쓰기도’ 했던 시절, 백석의 시 한 편 손수 노트에 베껴 써 보고 싶지 않았던 이는 드물 것이다. 그 수려한 외모의 청년이 ‘어느 사이에 아내도 없고 집도 없어져서’ 겨울밤 목수네 방 한 칸에 앉아 맑은 소주를 마시며 시를 짓곤 하였을 모습을 떠올려 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1912년에 평북 정주에서 태어났고 35년에 시 ‘정주성’을 발표했으니 20대 초반에 시인이 되었다. 근대 문학의 가장 풍요로운 서정성을 확보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월북 후의 문학 활동이 거의 연구되지 않았던 시인 백석, 그러나 그 살갑고 절실한 북방정서와 가슴이 턱턱 막혀오는 정서의 울림들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세계가 너무나 큰 고독과 허무감에 젖어 있는 탓에 그는 ‘쌀랑쌀랑 싸락눈’이 내리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살았던 것이다.

이 시를 읽을 때마다 짙게 배어나는 영롱한 연민 때문에 눈물이 당나귀처럼 데굴데굴 굴러가는 것을 목격하는 것은 나만이 아닐 터. 누군가는 그를 가리켜 우리 문학의 북극성이라고 했지만 그는 사슴처럼 산골로 들어가 언 눈 위에 자신의 눈망울을 문지르며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에’ 하염없이 공동체의 운명을 생각하곤 했을 것이다.

김경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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