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 100년-사랑의 詩]박두진/‘도봉’

  • 입력 2008년 5월 29일 03시 00분


우리 시사에서 이육사 유치환과 함께 남성적 음역을 뚜렷이 개척해 온 혜산 박두진이, 매우 드물게 존재론적 고독과 사랑의 비애를 노래한 초기 명편이다. 박목월 조지훈과 함께 펴낸 ‘청록집’(1946년)에 실려 있는 이 아름다운 시편은 ‘산새’도 ‘구름’도 ‘인적’도 모두 사라져 버린 어스름의 ‘가을산’에서 홀로 느끼는 쓸쓸함과 그리움을 담고 있다.

일찍이 소월은 “사랑하던 그 사람”(‘초혼’ 중에서)을 애타게 불러보았고, 윤동주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별 헤는 밤’ 중에서) 불러보았지만, 혜산은 “호오이 호오이 소리 높여/나는 누구도 없이” 불러보노라고 말한다. 그때 메아리는 산속을 깊이 돌아 오고, 붉은 해는 서서히 지고, 어스름은 어느새 밤으로 몸을 바꾼다. 이 깊은 밤에 시인은 “삶은 오직 갈수록 쓸쓸하고/사랑은 한갓 괴로울 뿐”이라고 말한다. 시인의 쓸쓸함과 괴로움을 촉발한 것은 ‘삶, 사랑’에 대한 의지였던 것이다. 이때 ‘그대’는 시인에게 끊임없는 ‘쓸쓸함’과 ‘괴로움’을 선사하는 존재이지만, 시인은 ‘그대’ 없이 홀로 겪어야 하는 “긴 밤과 슬픔”을 통해 ‘그대’를 향한 ‘삶, 사랑’의 깊이를 완성한다.

사랑 가운데는 매혹과 소멸을 동시에 꿈꾸는 격정의 사랑이 있고, 부재를 받아들이면서 존재에 가닿으려는 그리움의 사랑이 있다. 이 가운데 이 시편은 현저하게 후자를 지향한다. 혜산 시편의 전경(前景)이 ‘해’의 밝고 역동적인 세계였다면, ‘도봉’의 쓸쓸한 그리움의 세계는 그 확연한 후경(後景)이었던 셈이다. 그 그리움의 진정성이 ‘가을산의 어스름’처럼 낮고 슬프게 번져온다.

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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