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읽는 세상]250년 세월 뛰어넘은 정선과 후예들의 대화

  • 입력 2008년 5월 6일 03시 00분


겸재 앞에 서라, 이땅의 숨결 들으라

조선의 화성(畵聖)으로 손꼽히는 사대부 화가 겸재 정선(1676∼1759)이 ‘인왕제색도’를 그린 것은 일흔다섯 살 때였다. 비온 뒤 인왕산은 강렬하게 생동하는 기운으로 넘쳐흐른다. 말갛게 세수한 얼굴처럼 청량한 경관. 그 속에서 암벽은 거대한 몸통인 양 꿈틀거리고 산허리를 감싸 도는 안개는 숨소리를 내며 스르르 미끄러져 가는 듯하다.

서울 리움미술관에서 최근 막 내린 ‘한국 미술-여백의 발견’전에 나온 이 걸작에서 인왕산은 250여 년 세월을 건너뛰어 지금 여기에 하나의 우주로 성큼 다가온다. 노구의 것으로 믿기 힘든 담대웅혼한 필력 덕이다.

6월 15일까지 환기미술관에서 마련한 기획전에서 서양화가 윤명로(72)의 거대한 캔버스 작업과 마주칠 때에도 이와 유사한, 자연의 정신 혹은 본질에 잠시 맞닿은 듯한 느낌을 받는다. 아크릴 물감에 철가루를 섞어 그린 회화는 수묵의 은은한 울림을 전해준다. 물에 닿으면 색이 변하는 철의 특성상 단숨에 붓이 한 번 지나가면 그뿐, 덧칠은 안 된다. 우리 산수(山水)를 연상시키는 선들은 힘찬 붓질로 끊길 듯 이어진다. 여백의 공간과 절묘하게 어우러진 장중한 이미지, 고요함 속에 감지되는 속도와 율동. 2002년부터 시작한 윤명로의 ‘겸재 예찬’ 시리즈는 우리에게도 소중한 자산과 전통이 있음을 환기시키고자 출발한 작업이다.

겸재는 ‘보는 방식을 새롭게 한 사람이다’(미술평론가 정준모).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을 자기만의 고유한 양식으로 그려내는 ‘진경산수(眞景山水)’를 창안하고 완성했다. 당시 유행하던 중국풍 관념산수에서 과감히 벗어나 발품을 팔고 사생여행을 다니며 실재하는 강토를 화폭에 담았다. T자형 소나무와 날카로운 바위산을 표현하는 수직준 등 독창적 화법은 그렇게 정립했다. 일상이든 예술이든 익숙한 것과의 결별이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평생 사용한 붓을 모으면 붓 무덤을 이룰 것이란 세간의 평 그대로 겸재는 각고의 시간을 들여 조선 산수화의 새 물꼬를 열었다. 물론 그 바탕에는 전통과 중국미술에 대한 이해, 도전을 향한 진취적 정신이 자리했다. 그 덕에 우리 강산은 영원한 생명과 아름다움을 부여받았다.

그중에도 금강산은 겸재가 즐겨 그린 소재였다. 산 안팎을 샅샅이 둘러보며 100점 넘는 작품을 남겼다. 경기 고양시 아람미술관이 마련한 ‘오늘로 걸어 나온 겸재’전에서는 강렬한 먹과 능란한 필법의 ‘만폭동도’ 등 소품과 만난다. ‘정상에 우뚝 서니 만 리 바람 시원하다./푸른 하늘은 내 머리에 쓴 모자요,/동해는 내 손에 쳐든 한 잔 술일레라!’(이이의 ‘비로봉에 올라’) 화가의 손끝에서 자연과 인간은 하나가 되었다.

이 전시는 ‘겸재에게 말 걸기’를 시도한다. 겸재의 정신을 되살리는 근현대 화가의 회화와 설치 등을 함께 전시해 옛 그림과 동시대 미술의 흥미로운 대화와 소통을 보여준다. 평범한 산수처럼 보이지만 실측으로 풍경을 그린 김억의 회화, 박병춘의 라면으로 만든 설치작품과 칠판그림은 구석구석 들여다볼수록 재미를 더한다. 김호득의 폭포 그림에는 장엄한 기운이 넘치고, 진형미의 설치작품 ‘겹’에서는 산수 안으로 관람객이 걸어 들어가는 특이한 체험을 하게 된다.

주역과 성리학에 대한 깊은 사유,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화가의 시선을 두루 갖춘 겸재. 이전의 패러다임을 뛰어넘는 독자 노선을 개척함으로써 조선 회화에 독자성과 긍지를 부여했다. 더 나아가 중국 남방과 북방 화법을 끌어안아 재해석한 그만의 화법과, 이를 통해 집약시킨 조선의 정체성과 미의식은 나라 밖에까지 명성을 떨쳤다. 요즘 말하는 ‘글로컬리즘(glocalism)’의 표본이라고나 할까.

“세계화니 뭐니 해서 시선은 전부 바다 건너에 가 있고 우리 것을 너무 모른다. 지역성이 보편성을 띠면 세계화가 되는 것이 아닌가.”(윤명로)

겸재를 보면서 법고창신(法古創新)의 무게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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