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읽는 세상]存在와 不在

  • 입력 2008년 3월 25일 03시 00분


《완성되는 순간 해체가 시작된다. 티베트의 승려들이 색색가지 고운 모래로 제작하는 만다라의 운명이다.

짧게는 며칠, 길게는 여러 달에 걸쳐 불면 날까 애지중지 만들어내는 정교한 문양의 만다라는 작업이 끝남과 동시에 다시 모래로 환원돼 강물에 뿌려진다.

모래 만다라는 무상(無常)의 깨달음을 위한 종교의식이다.》

더 바쁠수록 더 빨리 사라진다

‘찾아가 보니 찾아온 곳 없네/돌아와 보니 돌아온 곳 없네/다시 떠나가 보니 떠나온 곳 없네/살아도 산 것이 없고/죽어도 죽은 것이 없네’(정호승의 ‘허허바다’)

무엇을 찍은 것일까. 덩그런 회색 화면엔 침묵이 흐를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모노크롬 추상작업처럼 보이는데 놀랍게도 인도의 타지마할과 번잡한 거리를 찍은 풍경사진이란다. 팔이 떨어질 듯한 고통 속에서 작가는 8시간 동안 한자리에서 3000장에서 1만 장의 컷을 찍었다. 이미지 중첩 기법, 즉 만상(萬象)의 이미지를 하나로 포개놓으니 사람도 사물도 풍경도 죄다 지워지고 없다. ‘존재하는 것은 모두 사라진다’는 주제 아래 서울의 로댕갤러리에서 열리는 김아타(52)의 개인전(Atta Kim:ON-AIR)에 선보인 ‘인다라’ 시리즈 작품들이다. 한마디로 ‘색즉시공’을 이미지로 입증하는 전시다.

기계공학을 전공한 뒤 독학으로 사진을 공부한 그는 2006년 아시아 작가 최초로 뉴욕 국제사진센터에서 개인전을 열어 평단의 상찬을 받은 사진가. 존재의 덧없음을 화두로 삼은 그의 작업들은 디지털 세상의 만다라로 다가온다.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존재가 사라지는 순간에야 진정한 존재의 가치를 안다.”(김아타)

‘하루라는 오늘/오늘이라는 이 하루에/뜨는 해도 다 보고/지는 해도 다 보았다고/더 이상 더 볼 것 없다고/알 까고 죽는 하루살이 떼’(조오현의 ‘아득한 성자’). 하찮게 보이는 하루살이의 평생이든, 아득한 꿈같은 인간의 한살이든 소멸의 운명에선 크게 다를 바 없다. 하지만 노자 도덕경에서 이르듯, 그릇이 유용한 이유는 그 속이 비어 있기 때문이다. 부재(不在)를 통해 존재의 가치를 일깨우는 김아타 작업은 동양적 사유로 서구인들을 사로잡는다.

김아타전이 재현, 기억, 기록이라는 사진에 대한 고정관념을 뒤집는다면, 또 다른 맥락에서 예술에 대한 이데올로기를 허물며 어떤 소중한 것도 영원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미술가가 있다. 불가리아 태생의 세계적 대지(大地)미술가 크리스토(73). 그가 작품 설치를 위해 그린 드로잉과 콜라주, 사진가가 촬영한 최종작업을 보여주는 전시가 갤러리 유로(4월 5일까지)와 박여숙화랑(4월 2∼22일)에서 잇따라 열린다. 아내와 함께 작업하는 크리스토는 2005년 뉴욕 센트럴 파크의 산책로를 따라 오렌지색 문(‘The Gates’)을 세워 화제를 모았다. 공공건물과 자연을 헝겊과 끈으로 포장하거나, 사막과 강에 오브제를 펼쳐놓은 대규모 설치작품들. 한시적 인공 조형물은 익숙하기에 지나친 풍경의 존재를 우리에게 새삼 각인시킨다.

그의 작업은 찰나에 빛났다가 모래 만다라처럼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이 특징. 기획부터 완성까지 길게는 30년 가까운 세월과 숱한 인력, 돈이 들어가지만 2, 3주 만에 철거된다. 그는 “나의 모든 작업은 ‘예술은 소유할 수 있고 영원히 존재한다’는 고정관념을 허무는 데 있다. 그 고정관념에서 해방된 자유야말로 내 작업의 주제다”라고 말한다.

눈에 보이는 것이 다는 아니다. 되풀이되는 존재와 소멸의 순환 속에서 우리는 버젓이 눈 뜨고도 많은 것을 지나쳐버린다. 때론 보이는 것 그 너머에 진실이 존재한다. 눈 밝은 예술가들은 거기서 숨은 이야기를 읽어낸다.

다시 김아타의 또 다른 작품 ‘축구경기’. 2시간 동안 한일 축구 경기를 장시간 노출로 촬영했다. 꽉 찬 관중석과 텅 빈 그라운드. 경기 내내 뛰어다녔을 선수들의 모습은 어디로 간 것일까. 작가는 장시간 노출 사진을 찍으면서 피사체들은 자신이 가진 고유의 속도로 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됐다. 움직임이 많은 물체일수록 이미지는 쉽게 날아가 버렸다. 더 많이 더 바쁘게 종종거릴수록 더 빨리 사라진다는 것, 그 얼마나 의미심장한 발견인가.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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