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 80년대에도 축구 열기는 지금에 못지않았다. 문제는 축구실력이 세계수준과 현격한 격차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문전처리 미숙과 체력 저하에 따른 뒷심 부족은 고질이었다. 이 시절 한국 축구에 불세출의 스타가 나타났다. 국민 대다수가 아직은 잘 못 먹고 헐벗던 1970년대 초반에 차범근은 만 19세로 역대 최연소 국가대표가 됐다. 놀라운 스피드와 발군의 돌파력, 빼어난 슈팅, 지칠 줄 모르는 체력, 타고난 성실성, 폭발적 헤딩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나에게 그의 ‘백넘버(등번호) 11’은 100m를 11초대에 주파하는 무서운 스피드를 나타내는 표지였다.
2006 독일 월드컵 취재진에 제공된 ‘질레트 미디어 통계책자’가 세계 각국 선수들에 대한 평가를 하면서 차두리 선수에 대해 언급한 부분은 나를 미소 짓게 만들었다. “아버지에게서 신체적인 장점은 물려받았지만 불행하게도 골 넣는 솜씨는 물려받지 못했다.”
솔직히 차두리 선수뿐이겠는가. 우리나라 역사상 차범근 선수에게 미치는 공격수는 단 한명도 없었다. 필자는 초등학생시절부터 아시아 무대가 좁다며 종횡무진 그라운드를 휘젓는 그를 보며 열광했다. 답답한 한국 축구에 구세주처럼 나타난 해결사의 모습은 그를 축구에 관해서는 뭐든지 할 수 있는 신처럼 보이게 했다. “찼다 하면 차범근, 떴다 하면 김재한.”
그가 뛰었는데도 지는 경기가 있으면 야속했다. “에이∼ 차범근도 사람이구나.” 그러나 이제는 전설로 남겨진 1977년 대통령배 축구대회 한국 대 말레이시아전. 1-4로 뒤지던 상황에서 종료 5분을 남겨놓고 3골의 소나기 골을 넣어 무승부로 만든 그는 곧 다시 신(神)의 위치로 돌아갔다.
내가 그를 더욱 숭상하게 된 계기는 물론 당시 서독 분데스리가에서 ‘차붐’이란 애칭으로 펼친 활약상이었다. 아시아무대에 만족하지 않고 당시 세계 최고 리그인 분데스리가로 가기로 한 것은 대단한 모험이었다. 많은 이가 그 결정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비웃었다. 하지만 나는 그가 큰 무대에서 성공해서 대한 남아의 기백을 세계에 떨치기를 기대했다. 유난히 병약했던 나는 그가 세계무대를 주름잡는 것을 보며 아마도 대리만족을 느꼈던 것 같다. 1979∼80시즌 명문 구단 프랑크푸르트에서 본격적으로 펼쳐진 그의 활약은 처음부터 눈부셨다. 차범근은 이후 소속 팀(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와 바이엘 레버쿠젠)을 둘 다 팀 역사상 처음으로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컵에서 챔피언으로 만들었다.
이런 쾌거를 무엇에 비유할까.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으나 박찬호가 LA 다저스와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에이스로 결정적 역할을 해서 두 팀을 월드시리즈에서 우승시키는 것에 비견될 수 있을까. 그리고 지금은 깨진 기록이지만 분데스리가 사상 외국인 최다 골 기록(308경기 98골)을 세우며 1989년 영예롭게 은퇴했다.
지금처럼 위성중계를 마음껏 보는 젊은 세대는 이해 못하겠지만 당시는 나라 사정이 넉넉지 못해 그의 활약상을 녹화중계로 볼 수밖에 없었다. 서양 사람들에 대해 깊은 열등감도 존재했다. 그러나 그가 그라보스키, 횔첸바인, 페차이와 같은 당대의 대스타들과 같은 팀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뭔지 모를 뿌듯함을 느꼈다. “한국인도 세계무대에서 꿀리지 않고 경쟁할 수 있구나!” 그때 일본의 오쿠데라라는 스타플레이어가 분데스리가에 먼저 진출해 FC쾰른에서 뛰고 있었는데, 차 선수가 그와의 경쟁에서 압도적 우위를 점하는 것에서 묘한 쾌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리고 차 선수가 큰 부상으로 선수생활이 위태로워졌을 때 우리 일처럼 걱정했다. “아∼ 이대로 끝나서는 안 되는데.” 1980년 6월 그가 소속팀 프랑크푸르트의 일원으로 한국 국가대표팀과 친선경기를 했을 때 나는 만사 제쳐놓고 동대문운동장에 갔다. 마치 장원급제해 금의환향한 삼촌을 보면서 자랑스러워하는 심정이랄까. 이 경기가 끝난 뒤 얼마 안 돼 들이닥칠 집안의 우환은 상상조차 못한 채 그 경기를 보며 마냥 즐거워했다. 공교롭게도 아버지(강창성 전 국군보안사령관)가 집에 들이닥친 신군부 수사관에 의해 체포된 그 우환이 일어난 순간은 ‘차범근의 후계자’인 최순호가 차범근의 최연소 기록을 깨는 국가대표 데뷔전을 하면서 첫 골을 성공시켰을 때였다. 그리고 그 순간 나의 평범한 청소년기는 종말을 고했다.
1970, 80년대 당시 한국은 아직 절대적 기준에서는 못살았지만 무섭게 성장해 나가고 세계 속으로 뻗어가던 시대였다. 차 감독이 얼마 전 한 언론에 기고한 대로 그때는 ‘성공’에 모든 것을 걸고 ‘전투’처럼 살았던 시대였다. 그래서 요즘 세대가 누리는 여유는 생각지도 못하고 각박하게 살았던 시대였지만, 한편으로는 불가능한 것을 이루고 후대에 번영을 안겨준 시대이기도 했다. 이러한 시대정신과 겹쳐진 그의 이미지는 단순한 스포츠 스타의 그것이 아니라 시대를 규정짓는 하나의 아이콘이요 우상이었다.
차범근, 그는 내 마음속의 영원한 ‘등번호 11’의 영웅이다.
강규형 명지대 교수·현대사·클래식 칼럼니스트
■ “지금도 내 맘을 두근거리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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