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영화, 생각의 보물창고]‘복면달호’

  • 입력 2007년 6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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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이혁재 기자
그래픽 이혁재 기자
《“이차선 다리 위에 마지막 이별을/스치는 바람에도 가슴이 아파와….” 올해 2월 개봉된 영화 ‘복면달호’에서 배우 차태현이 부르는 주제가 ‘이차선 다리’입니다. 정감 어리고도 가슴을 저미는 트로트 곡이죠. ‘복면달호’의 제작자가 개그맨 이경규 씨라는 사실은 이 영화에 빛이자 그림자였습니다. 이경규라는 이름 석 자 때문에 영화는 세간에 급속도로 알려질 수 있었지만, 사람들은 이경규라는 이름 때문에 이 영화를 손쉽고 가벼운 영화로 오해하기도 했으니까요. 여러분, 혹시 생각해 보았나요? ‘복면달호’에서 가수 ‘봉필’이 쓰는 복면은 ‘내가 생각하는 나’와 ‘남이 생각하는 나’ 사이의 안타까운 괴리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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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면 벗어던진 달호… 왜 트로트를 록으로 바꿔 부를까?

[1] 스토리라인

멋진 로커(rocker)가 되기를 꿈꾸는 청년 봉달호(차태현). 그는 지방 나이트클럽에서 트로트 반주를 하며 근근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달호는 ‘큰소리 기획’ 장 사장(임채무)에게 전격 발탁돼 꿈에 그리던 서울로 올라갑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장 사장의 사무실은 고작 옥탑방이었고 소속 가수들은 하나같이 삼류 ‘뽕짝’을 부르는 무명 가수들이었습니다. 장 사장과의 계약에 묶여 울며 겨자 먹기로 트로트 가수가 된 달호. 그는 ‘봉필’(이 이름은 ‘뽕짝의 느낌·feeling’이란 뜻의 ‘뽕필’에서 나왔습니다)이란 가명으로 고대하던 지상파 방송에 출연합니다.

운명의 장난은 여기서 시작됩니다. 로커를 꿈꾸던 자신이 ‘뽕짝’ 가수로 나서게 된 현실을 부끄럽게 여긴 달호는 복면을 쓰고 무대에 오르는 ‘대형사고’를 치고 맙니다. 그러나 달호는 하루아침에 스타가 됩니다. 복면을 쓰고 트로트를 부르는 그의 모습에 사람들이 열광한 것이죠.

‘복면가수 봉필’에 대한 궁금증이 높아가는 가운데 연말 가수왕전이 열립니다. 무대에 선 달호는 느닷없이 복면을 벗습니다. “트로트 부르는 게 부끄러워 복면을 썼었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달호. 그에겐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까요?

[2] 핵심 콕콕 찌르기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복면달호’의 주제를 관통하는 단 하나의 글자는 무엇일까요?

그건 바로 통할 ‘통(通)’입니다. 영화가 진정으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달호의 말마따나 “모든 음악은 소중하다. 장르의 차이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니까요.

당초 달호는 ‘록=위대한 것’ ‘트로트=뽕짝=보잘것없는 것’이라는 흑백론에 빠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같은 사무실의 (미천해 보이기만 했던) 선배 가수가 달호가 즐겨 부르는 록 음악 ‘매일 매일 기다려’를 트로트로 멋지게 편곡해 부른 뒤 이런 말을 건네는 순간부터 달호의 마음은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제 생각에는요. 음악은 다 통하거든요. 이렇게 저는 마음으로, 가슴으로 느껴지는 것들이 다 음악이라고 생각해요.”

그렇습니다. 트로트와 록은 서로 다른 게 아니었습니다. 우열을 따질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듣는 이의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는 점에서 모든 장르의 음악은 서로 통(通)하는, 소중한 존재들인 것이죠. 마지막 순간, 복면을 벗은 달호가 자신의 히트곡 ‘이차선 다리’를 트로트로 부르다가 돌연 록으로 바꿔 부릅니다. 바로 “모든 음악은 통한다”는 영화의 메시지가 함축되어 있는 장면입니다.

[3] 종횡무진 생각하기

자, 이제 영화의 주요 소재인 ‘복면’에 대해 생각해 볼까요? 달호는 왜 복면을 썼을까요? 알다시피 트로트를 부르는 자신이 부끄러워 복면을 썼습니다. 얼굴을 감추기 위해서 말이죠. 하지만 그 결과는 어떤가요? 정체를 감추기 위해 쓴 복면이 오히려 달호 자신을 출세시키는 뜻밖의 결과를 낳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척 흥미로운 아이러니(irony)와 맞닥뜨리게 됩니다. 달호는 자기 정체를 감추기 위해 복면을 썼건만, 사람들은 바로 그 복면 때문에 달호를 기억하게 됐으니 말입니다. 다시 말해, 달호는 자신의 아이덴티티(identity·정체성)를 숨기려고 복면을 썼지만 결과적으로 그 노력이 ‘복면가수 달호’라는 제2의 정체성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복면을 쓰고 카페에 나타난 달호. 여자친구 서연(이소연)이 “그 복면 좀 벗을 수 없어? 나랑 만나면서까지 그걸 써야 해?”라며 서운해하자 달호가 툭 내뱉은 대답에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정체성 사이에 놓인 달호의 고민이 집약되어 있습니다.

“왜 그래? 나 이거(복면) 안 쓰면 사람들이 나인 줄 못 알아본단 말이야.”

아, 얼마나 이상야릇한 시추에이션인가요? (복면을 써서) 자신을 감추면 사람들은 자기를 쉽게 알아보고, 반대로 (복면을 벗어) 자신을 드러내면 사람들은 자신을 알아볼 수 없게 되다니…. 결국 사람들은 달호라는 인간 자체를 사랑했던 게 아니라 복면을 쓴 달호의 모습, 즉 ‘복면달호’에 열광했을 뿐이었던 거죠.

‘인간으로서의 자신’과 ‘가수로서의 자신’ 사이에 만들어진 이런 안타까운 괴리를 깨달은 달호는 마침내 무대 에서 복면을 벗음으로써 두 정체성 간의 통합을 시도합니다. 서로 다른 두 개의 정체성이 딱 만나는 이 순간은, 트로트와 록이라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장르가 ‘마음의 음악’이라는 하나의 접점에서 만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달호의 두 얼굴이야말로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본질인지도 모릅니다. 연예인의 ‘진짜 정체성’보다는 호화롭게 포장된 ‘제2의 정체성’을 생산해 내고 또 그것을 판매함으로써, 사람들에게 현실이 아닌 환상을 심어 준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여러분, ‘복면달호’에서 달호의 여자친구이자 가수 지망생인 서연을 기억하시죠. 그녀는 모자란 노래 실력을 갖고도 트로트 가수가 되기를 포기하지 않는 자신의 운명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달호야. 인디언들이 기우제를 지내면 어김없이 비가 온대. 왜인 줄 알아? 인디언들은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거든.”

그렇습니다. 어느 날 행운이 나를 찾아온다면, 그건 단지 재수가 좋아서가 아닙니다. 행운은 쉼 없이 노력한 자에게 운명의 신이 내리는 아름다운 선물입니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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