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 흐르는 한자]<589>淸 溪 川(청계천)

  • 입력 2003년 7월 1일 17시 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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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 溪 川(청계천)

淸-맑을 청 溪-시내 계 濫-넘칠 람

渠-도랑 거 橋-다리 교 覆-덮을 부

얼마나 물이 맑았으면 淸溪川이라고 했을까? 산과 강을 한꺼번에 거느리는 都城(도성)이 흔치 않거늘 여기에다 맑은 시내까지 곁들였으니 서울은 참 복도 많은 都邑(도읍)인 셈이다. 仁旺(인왕)과 北岳(북악) 사이에서 發源(발원)하여 몇 개의 실개천을 합쳐 흐르다 木覓(목멱·현 南山)에서 다시 물줄기 3개를 받아 서에서 동으로 흘러 中浪川(중랑천)으로 유입되면서 이번에는 흐름을 서쪽으로 틀어 漢江(한강)으로 흘러든다. 총 길이 약 11km, 근 30리 물길이다. 淸溪川이라는 이름은 상류에 흐르던 淸風溪川(청풍계천)에서 유래한다.

이 아름다운 내가 아름다움을 잃게 된 것은 역시 사람들 때문이었다. 1394년 조선왕조의 도읍지가 된 이후 맑은 물과 생활하수가 함께 흐르는 개천으로 바뀌게 된다. 여기에다 토사가 싸이면서 河床(하상)이 높아져 매년 여름만 되면 氾濫(범람)과 浸水(침수)가 되풀이되어 그 피해가 심각하였다.

결국 太宗 11년(1411)에 開渠都監(개거도감)을 두어 開渠(도랑을 침)에 착수하게 된다. 경상, 충청, 전라 3도의 장정 5만 명을 동원하여 바닥을 파내고 石築(석축)을 쌓는가 하면 橋梁(교량)도 敷設(부설)하였는데 대표적인 다리에 廣橋(광교)가 있다. 이름에 걸맞게 도성 안에서 가장 넓은 다리로 대보름에 踏橋(답교·다리밟기)가 성행했던 곳이다.

또 水標橋(수표교)도 있다. 世宗 2년(1420) 敷設될 당시 인근에 馬市場(마시장)이 있었다 하여 馬廛橋(마전교)라고 불렸다. 생활하수가 늘고 토사의 유입량이 증가하자 英祖 36년(1760) 2월에 대대적으로 浚川(준천·하천의 바닥을 파냄)하면서 다리에 水標石(수표석)을 세워 물높이를 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근대화의 바람이 불면서 淸溪川의 모습은 크게 바뀐다. 즉 1958년 5월부터 1978년까지 있었던 覆蓋工事(부개공사)가 그것이다. 이와 함께 총 연장 5.6km의 高架道路(고가도로)가 건설되면서 淸溪川은 서울시내 교통의 간선이자 상가밀집지역으로 그 기능이 커졌다. 하지만 교량의 노후화에 따른 안전문제와 오염, 미관 등의 문제로 전부터 철거론이 제기되어 왔던 터였다.

어제 淸溪川 복원공사 착공식이 있었다. 2년 뒤면 맑은 물이 흐르는 개천이 된다니 그동안 濁溪川(탁계천)의 汚名(오명)을 씻고 淸溪川이라는 제 이름을 되찾게 되는 셈이다. 2년 뒤의 모습이 궁금하다.

鄭 錫 元 한양대 안산캠퍼스 교수·중국문화 sw478@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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