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과 소설가가 추천하는 가을 시선 20]<14>불과 얼음

  • 입력 2007년 10월 15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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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더군요/몸이 하나니 두 길을 다 가 볼 수는 없어/나는 서운한 마음으로 한참 서서/잣나무 숲속으로 접어든 한쪽 길을/끝 간 데까지 바라보았습니다. ―‘가지 않은 길’ 중에서》

산속 오두막 사립문 가에 우연히 나와 자란 산초나무에 새까만 열매들이 꽃보다도 예쁘게 여물어 반짝인다. 길가 쪽으로 휘어진, 가시가 많은 산초나무를 함부로 스칠 수는 없으나 그래도 모르는 척 지나쳐서 팔뚝에 가시 긁힌 상처를 가져 보고 싶은 심사는 아마도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살고 있는 프로스트의 이 소년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나도 한때는 그렇게 자작나무를 휘어잡는 소년이었다./그래서 나는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걱정이 많아지고/인생이 정말 길 없는 숲 같아서/얼굴이 거미줄에 걸려 얼얼하고 근지러울 때/그리고 작은 가지가 눈을 때려/한쪽 눈에서 눈물이 날 때면/더욱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진다.’(‘자작나무’ 중에서)

조석으로 바람이 선득해지면 세상은 맑아지기 시작한다. 일러 가을이다. 청명한 하늘과 청명한 숲, 그 속에서 유난히 일찍 물들어 가기 시작하는 북나무나 벚나무의 잎들을 나는 어느 사상서적의 핵심 단락보다 더 깊이, 더 오래 되새겨 바라보고 싶다. 청명 속으로 나타나는 그 얼굴이 신의 그것이 아니겠는지 확신하면서. 그리고 또다시 의심하면서. 일찍이 그 질문의 선구자들 중에서 프로스트는 내게 아무렇지도 않게 놀라움을 선사하는 기막힌 노인이었다.

‘자연의 연초록은 찬란하지만,/지탱하기 제일 힘든 색./그 떡잎은 꽃이지만,/한 시간이나 갈까./조만간 잎이 잎 위에 내려앉는다./그렇게 에덴은 슬픔에 빠지고,/새벽은 한낮이 된다.’(‘어떤 찬란한 것도 오래가지 못하리’)

떡잎의 연초록이 쉬 짙어져 제 빛을 잃는 것에서 ‘에덴’이 ‘슬픔’에 빠지는 것을 본다. 떡잎 속에서나 있을 수 있다는 낙원의 발견은 얼마나 아무렇지 않은 놀라움인가. 그렇듯 삶이 절망의 바다라는 것을 보다가도 ‘샘 치우는’ 단순한 행동을 통해 큰 지혜에 이르고자(이른다가 아니라!) 한다.

‘샘 치러 나가 볼까 합니다;/그저 물 위의 나뭇잎이나 건져내려고요/(물이 맑아지는 걸 지켜볼는지도 모르겠어요)/오래 안 걸릴 거예요. 같이 가시지요.//엄마소 옆에 있는 어린/송아지를 데리러 가려고 해요. 너무 어려서/엄마소가 핥으면 비틀거리지요./오래 안 걸릴 거예요. 같이 가시지요.’(‘목장’)

샘에 가라앉은 나뭇잎이나 건져내는, 별것 아닌 행위 속에서도 잃어버린 낙원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이 아슬아슬한 정신의 곡예가 바로 최대의 겸손이 아니겠는가. ‘물이 맑아지는 걸 지켜볼는지도 모르겠어요’라고 괄호 속에 숨겨놓은 저 문장 속에서 내내 나는 나오고 싶지 않다.

‘까마귀 한 마리/독미나리 가지를 흔들어/내 위에/눈가루 떨어지니//기분 한결/달라지고/후회스러운 하루/조금은 구해 내네.’(‘눈가루’)

눈 내린 겨울 아침 나는 지난 한해살이의 후회들을 들고 숲에 들어가야 할 것이다. 까마귀가 주는 맑은 눈가루를 머리에 맞아야 조금은 나아질 테니까. 그때 산초나무 열매들 아직 있을까?

장석남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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