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그곳에 가면 '나 밖의 세상'과 통하고… 백화점 문화센터

  • 입력 2007년 4월 6일 03시 3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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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점은 물건만 사는 곳이 아니다. 고객들은 즐거움을 찾아, 혹은 창업의 기회로 활용하기 위해 문화센터의 다양한 강좌를 수강한다. 신세계백화점의 ‘손진호의 와인 100배 즐기기’, 롯데백화점의 ‘직장인을 위한 런치 스페셜’과 ‘도예강좌’(위부터 시계방향). 원대연 기자
백화점은 물건만 사는 곳이 아니다. 고객들은 즐거움을 찾아, 혹은 창업의 기회로 활용하기 위해 문화센터의 다양한 강좌를 수강한다. 신세계백화점의 ‘손진호의 와인 100배 즐기기’, 롯데백화점의 ‘직장인을 위한 런치 스페셜’과 ‘도예강좌’(위부터 시계방향). 원대연 기자
작가 등용문으로 불리는 문학평론가 임헌영 씨의 강좌. 사진 제공 현대백화점
작가 등용문으로 불리는 문학평론가 임헌영 씨의 강좌. 사진 제공 현대백화점
《지난달 30일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백화점 본점 13층.

어디선가 치즈 스파게티와 단호박 크림수프 냄새가 솔솔 풍긴다. 매주 금요일 낮 12시에 열리는 ‘직장인을 위한 런치 스페셜’ 강의실이다.

“날씨가 화창하네∼. 다른 곳에 놀러가고 싶은 유혹을 느끼지 않아요? ‘자기들’ 표정 좀 밝게 해.”

요리를 시연하는 강사 임효숙(48) 씨의 구성진 입담에 40여 분이 금세 지나갔다. 다음 순서는 질문과 시식. 시간이 짧아 아쉽게도 수강생의 요리 실습은 없다.

수강생 김진희(30·한국은행) 씨는 “육아 때문에 오전과 퇴근 후에는 시간을 내기 어려워 점심시간을 이용해 요리를 배우고 있다”고 말했다.

이 강좌에는 점심시간을 알차게 활용하는 이른바 ‘점심 형’ 직장인 10여 명이 수강하고 있다. 김현아(34·HK코리아) 씨는 “요리를 배우면서 점심도 간단히 해결할 수 있어 유익하다”고 말했다. 수강생들은 백화점 부근에서 근무하는 20, 30대 여성이 대부분이다.

한때 백화점 문화센터 강좌라면 꽃꽂이나 요리 강습을 떠올렸지만 지금은 다르다. 주요 백화점 문화센터에는 300개 이상의 다양한 강좌가 개설돼 있다. 롯데백화점 본점의 경우 3개월 정규 코스만 500여 강좌에 이른다. 일부 인기 강좌는 서두르지 않으면 수강이 쉽지 않을 정도로 사람이 몰린다.》

○ 직장인을 위한 강좌 확대

임 씨는 “저녁 강좌에는 백화점 주변 직장인 30명이 수강하고 있다”며 “런치 강좌는 바쁜 직장인을 겨냥한 틈새시장인데 의외로 호응이 좋다”고 소개했다. 뚝배기불고기와 해물국수전골 등 전통 요리 외에 시저 샐러드, 캘리포니아 롤 등 젊은 직장인들이 선호하는 메뉴로 구성돼 있다.

백화점들은 저녁 시간과 주말에 직장인을 대상으로 한 강좌를 확대하고 있다.

신세계는 퇴근 시간대에 ‘전문직 종사자, 성공 커뮤니케이션’ ‘직장인 스트레스 탈출과 오피스 요가’ ‘직장인 댄스 스포츠’ 등을 개설했다.

MBC 이재용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롯데의 ‘프로 대화 스킬과 이미지 전략’에는 아나운서 지망생은 물론 프레젠테이션 기회가 많은 직장인의 참여가 활발하다.

신세계 경영지원실 공재훈 주임은 “최근 문화센터에서 두드러진 변화는 직장인 수강생이 많아졌다는 점”이라며 “6월 개강하는 여름 학기에는 직장인을 겨냥한 강좌를 늘릴 계획”이라고 말했다.

○ 문화센터는 라이프스타일의 첨병

문화센터의 강좌에서는 라이프스타일의 시대별 변화를 엿볼 수 있다.

1980년대까지 문화센터는 백화점을 자주 이용하는 고객을 빼면 그리 가까운 공간은 아니었다. 강좌도 여가생활에 도움이 되는 내용이 주류를 이뤘다. 쉽게 배워 생활에 활용할 수 있는 노래, 댄스, 공예, 홈패션, 요리, 육아 강좌가 많았다.

90년대에는 인문학적 깊이가 있는 강좌와 쉽게 만나기 어려운 명사 특강이 인기를 끌었다. 박물관 교실, 인문사회과학 아카데미, 미술 큐레이터 입문, 역사 아카데미 등이 생겨났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가장 큰 변화는 사회적 이슈나 트렌드를 반영한 ‘맞춤식’ 강좌가 늘었다는 점. 여성 납치 사건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이 커지면서 호신술 강좌가 늘었고, ‘용사마(배용준)’ 화보집이 인기를 끌면서 각종 ‘몸짱’ 프로그램이 각광 받았다. 아줌마 비보이 강좌가 생겨난 것도 비보이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과 무관치 않다.

지난해 ‘쌍춘년’에 이어 올해 ‘황금돼지해’와 관련된 속설이 유행하자 백화점 문화센터들은 경쟁적으로 연애와 출산을 돕는다는 강좌를 개설했다.

현대백화점 문화센터 백성혜 차장은 “고객들의 라이프스타일에 민감한 백화점의 특성상 최신 트렌드를 반영하거나 새로운 유행을 이끌 수 있는 강좌를 개설하는 데 공을 많이 들인다”고 설명했다.

○ 참살이, 럭셔리, 마니아형 강좌 인기

“오늘은 치즈와 와인의 궁합에 대해 배웁니다. 치즈도 와인처럼 기후가 큰 영향을 미치지요. …. 딱딱한 치즈는 섭씨 8도에서 12도 사이에 보관하다 손님이 방문하기 2시간 전에 꺼냅니다.”

신세계 강남점에서 진행된 ‘손진호의 와인 100배 즐기기’. 손진호 중앙대 산업교육원 와인전문과정 주임교수가 이론과 함께 직접 와인을 맛보는 실습 위주로 강의한다.

수강생 박화순 씨는 “초급에서 시작해 중급 과정을 듣고 있다”며 “가족이나 친구 모임에서 와인을 자주 접하는데 더 알고 싶어 등록했다”고 말했다.

손 교수는 “과거와 비교할 때 와인 강좌를 듣는 목적의식이 분명한 수강생이 많다”며 “낮 시간은 주부, 오후 늦은 시간은 20, 30대 직장인이 주류”라고 소개했다.

이처럼 문화센터의 주요 강좌는 점점 세분화되는 것이 특징이다.

롯데백화점 서비스혁신팀 최재훈 문화센터 담당은 “내가 좋아하는 분야, 관심 있는 분야의 정보와 지식을 위해서라면 돈을 아끼지 않는 것이 요즘 고객들의 특징”이라며 “참살이, 럭셔리, 마니아형 강좌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두루뭉술한 강좌는 이제 더는 통하지 않는다. 지난 2, 3년간 문화센터를 휩쓴 요가는 최근 스트레칭, 피트니스, 클래식 등 목적에 따라 10여 개로 나뉜다.

커피 분야에서 가장 뜬 프로그램은 에스프레소 강좌다. 미술은 실기에서 이론을 걸쳐 경매로 경향이 바뀌고 춤은 플라멩코, 아르헨티나 탱고, 벨리댄스, 재즈댄스 등 수십 가지로 세분화됐다.

○ 문화센터는 커뮤니티다

중년층 이상의 수강생들은 평소 아는 사람끼리 모여 함께 강의를 듣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젊은 수강생들은 강좌를 계기로 새로운 커뮤니티를 형성한다.

신세계의 ‘플루트 앙상블’은 강사 주희진 씨의 플루트 강좌에서 시작된 순수 아마추어 연주팀이다. 이 강좌 출신 회원 10여 명이 비정기적으로 공연하며 연말에는 장애인복지관, 노인복지관 등에서 공연 봉사활동을 펼친다.

강좌를 수강한 뒤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통해 정기적인 모임을 갖는 커뮤니티로 발전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롯데에서 와인 강좌를 수강한 회원들은 ‘리틀뱅’이라는 인터넷 동호회를 운영하고 있다.

현대백화점 목동점의 경우 각종 문화강좌 수강생들이 모여 ‘아트&컬처’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문화센터 강의실에서 정기 모임을 열고 백화점 측에 듣고 싶은 강좌를 의뢰하기도 한다.

○ 남성을 유혹한다

문화센터는 요즘 남성 고객을 집요하게 ‘유혹’하고 있다.

주 5일 근무제 확산에 따라 늘고 있는 주말 직장인 강좌 및 가족단위 강좌, ‘투잡스’ 족을 위한 전문가 과정의 주요 타깃은 남성이다.

신세계 문화센터 황윤주 주임은 “분명한 것은 문화센터가 이제는 주부만의 공간이 아니라는 점”이라며 “요즘 남자들은 요리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주말 요리 강좌에 남성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건강과 취미활동으로 상징된 문화센터 이미지는 최근 몇 년간 새 인생 설계를 위한 공간으로 바뀌고 있다. 부동산, 주식, 금융 등의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재테크 강좌와 영어 지도사, 글짓기 전문과정, 커피와 케이크 전문점 창업 과정이 여전히 인기다.

문화센터에서 만난 40대 남성은 “직장에 다니고 있지만 평생직장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며 “취미를 살려 케이크 전문점을 낼 계획”이라고 말했다.

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스타강사의 힘! 접수 10분만에 마감

대학에만 명강사가 있는 게 아니다. 백화점 문화센터에도 강사의 ‘힘’에 의해 접수가 10분 만에 마감되는 인기강좌가 있다.

문학평론가 임헌영 씨는 문학과 관련된 강좌에서 독보적인 존재다. 1993년부터 주로 현대백화점에서 생활 글쓰기, 문학의 이해, 명작을 통한 세상읽기를 강의했다. 수강생 중 수필작가로 등단한 사람이 140명에 이른다. 문학의 위기라고 하지만 그의 강좌는 수강생으로 등록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롯데백화점의 ‘소설 창작 교실’은 소설가 구효서 씨가 진행한다. 수강생이 여러 차례 소설가로 등단해 문화센터의 ‘신춘문예 사관학교’라는 명성을 얻었다. 15명이 정원이지만 현재 1개 반을 더 늘려 운영하고 있다.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의 ‘메소포타미아 신화’도 인기다. 오찬을 함께하는 강의인데 신화에 대한 독특한 해석으로 유명하다.

노래교실은 유행이 지난 것처럼 여겨지지만 수강생들의 열기는 강사에 따라 달라진다. 30년 이상의 노래 강사 경력을 지닌 구지윤 씨는 ‘노래교 교주’이자 ‘노래강사 대모’로 불린다. 열정적인 무대 매너와 탁월한 유머 감각으로 중장년 수강생들에게 변함없는 인기를 얻고 있다. 150명 이상이 들어가는 대형 강의실은 그의 차지다.

구 씨는 “언제나 회원들이 마음껏 소리 지를 수 있게 한다”며 “내 강의에 들어온 회원이라면 무조건 1시간 동안 행복하게 만드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부동산 재테크 분야는 고종완 RE멤버스 대표와 고준석 신한은행 부동산재테크팀장 등이 스타다. 강좌마다 200명 이상이 몰린다.

원정혜(요가), 서은영(패션), 이주헌(미술), 서지연(커피), 이기 요코(일본어), 강효순(노래), 강미숙(어린이 발레) 씨도 유명하다.

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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