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아크로폴리스]<31>한일관계 현주소와 미래

  • 입력 2004년 9월 1일 17시 5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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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7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진선여고 강연장. 중앙대 손열 교수(가운데)가 대형 프로젝션을 활용해 2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일 관계의 현주소와 미래에 대해 강연하고 있다.-신원건기자
지난달 27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진선여고 강연장. 중앙대 손열 교수(가운데)가 대형 프로젝션을 활용해 2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일 관계의 현주소와 미래에 대해 강연하고 있다.-신원건기자
《“한국에 가장 중요한 나라는 어디일까요?” (중앙대 손열 국제대학원 교수)

“미국이요.” “중국도 중요합니다.” (학생들)

“일본은 어떨까요?” (손 교수)

“….”

지난달 27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진선여고. 이날 ‘한일관계’를 주제로 강연에 나선 중앙대 손열 교수는 강의에 참석한 2학년 학생 70명에게 한국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나라를 물었다.

미국을 꼽는 학생들이 가장 많았지만 중국이라고 응답한 학생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에 대해서는 약속이나 한 듯 입을 다물었다. 한일문화 개방 세대인 청소년들에게도 일본은 여전히 ‘가깝고도 먼 나라’인 것일까.

손 교수와 진선여고 학생들은 이날 2시간 동안 강연과 질의응답을 통해 한일관계의 현주소에 대해 진지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

―일본이 주변국들이 반대하는 신사참배와 교과서 왜곡 등을 강행하며 아시아 국가를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이유는 뭘까요?

▽손 교수=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나타난 서구 지향적 태도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일본은 19세기 말 ‘서양 대 일본’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통해 문명의 중심을 중국에서 서양으로 돌리고 강력한 근대화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야만의 아시아를 넘어 문명의 서양을 좇는 ‘해바라기 근성’이 싹튼 것이죠.

서양을 따라잡기 위해 근대적인 군대, 산업화된 경제, 식민지 확보에 나선 일본은 스스로를 아시아의 대표이자 후견인으로 인식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제국주의적 근대화는 전쟁을 통해 ‘서양에 대한 반란’으로 이어졌고, 제2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처참하게 종지부를 찍게 됐죠.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일본은 미국의 후견 하에서 미국을 좇는 발전전략을 지속했어요. 일본이 서양(미국)과의 관계를 우선하고 한국 등 아시아 국가를 2차적으로 고려하는 아시아 경시 태도를 갖게 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일본은 이라크에 자위대를 파병하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으로의 진출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일본이 미국의 그늘 속에서 ‘2등 국가’로 남아 있을까요?

▽손 교수=1945년 일본을 점령한 미국은 일본의 비무장화와 민주화를 추진했습니다. 그러나 냉전시대에 돌입하면서 소련의 위협이 커지자 일본 경제의 부활을 통해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는 전략으로 선회했죠.

일본도 안보를 미국에 위임하고 경제 부흥에 주력하는 ‘요시다 노선’을 택하고 미국의 안보 그늘에 들어갔습니다. 전쟁과 무력행사를 영구히 포기한다는 일본 신(新)헌법 제9조와 천황제 유지를 담은 제1조는 각각 미국에 안보를 위임하는 한편 천황제로 사회 경제적 안정을 유지하려는 교묘한 정치전략이었던 셈이죠.

결국 일본은 1968년 독일을 제치고 미국에 이어 서방진영 제2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하며 ‘화려한 부활’에 성공합니다. 일본의 경제성장은 1980년대 교과서 왜곡 파동,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등 우경화 경향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일본이 과거와 같은 군국주의나 군사적 재무장으로 돌아가기는 쉽지 않을 거예요. 세계 최강 국가인 미국이 일본이 과거 군국주의로 회귀하려는 흐름을 막는 ‘병마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죠.

―일본이 군위안부나 교과서 왜곡 등의 문제에 대해 아직 철저하게 반성하지 않고 있어 반일감정이 줄어들 수 없어요. 그러나 외교를 생각한다면 이런 감정적인 대응이 꼭 현명한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손 교수=과거사 문제 등 아시아적 이슈에 대한 일본의 관심은 여전히 2차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어요. 우리의 국력이 강해지거나 일본 내에 건강한 정치체제가 구축될 때에야 일본의 태도에도 변화가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일본 전체에 대한 정서적, 규범적 반대는 한국의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아요. 일본에 대한 실망이 ‘일본 때리기(Japan Bashing)’를 넘어 ‘일본 무시하기(Japan Passing)’로 전환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태도가 시대착오적이라는 점을 점잖게 지속적으로 지적하면서 동시에 국익 추구라는 측면에서 일본을 활용하는 전략을 모색해야 해요.

일본의 자본력과 기술력은 중국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죠.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을 적절히 활용할 필요도 있습니다.

―한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면 우리에게 손해가 되는 것은 아닐까요?

▽손 교수=한일 FTA를 체결하기 위해서는 관세 철폐에 따른 경제적 이득, 외교적 효과, 국내 정치 갈등 등 3가지 문제를 고려하는 ‘3차 방정식’을 풀어야 합니다. FTA 체결을 통해 국가간, 엘리트간 외교에 국한된 한일관계를 복합적 상호 네트워크로 발전시킬 수 있지요. 또 한일 양국이 FTA를 통해 글로벌 생산 네트워크를 구축해 산업 경쟁력을 강화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자유무역에 따라 이득을 보는 사람과 손해를 보는 사람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거죠. FTA 체결에 앞서 정부가 이해를 달리하는 국내 관계자들과 대화하면서 일본과도 협상을 병행하는 ‘양면협상’ 전략으로 국내의 정치적 반발을 최소화해야 합니다.

정리=박 용기자 parky@donga.com

▼강연 요약▼

미래 지향적 한일관계는 어떤 모습일까. 21세기 들어 일본은 과거에 비해 한국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북핵 문제와 중국의 급부상이 일본에 커다란 도전으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기업 경쟁력 확보와 국내 구조조정 수단으로 동아시아를 활용하고, 다른 한편으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한국을 끌어안으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일본이 한일 자유무역협정(FTA)에 적극 매달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일까. 첫째, 일본이 한국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원하게 하고 한국이 아쉬워지도록 외교역량을 키우는 일이다. 중국과 북한을 활용해 일본을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는 외교력도 필요하다.

둘째, 친일과 반일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일본을 재인식하는 것이 현명한 한일관계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구체적 정책, 명백한 의사와 태도, 체계화된 이론에 근거한 이념적 성향을 갖추어 일본을 비판하고 대일 외교를 이끌어 가야 한다. 반일 감정은 외교정책 관념이 아니라 협상 수단에 불과할 뿐이다.

이와 더불어 ‘감정’보다 ‘이익’이 우선되는 양자관계를 끌어가기 위해서는 일본을 역내(域內) 국가의 이웃으로서, 전략적 협조와 경쟁의 ‘정상적(normal) 관계’로 냉정히 다룰 필요가 있다. 이것이 곧 미래지향적 한일관계가 되는 것이다.

끝으로 한일관계를 중층적으로 모색할 필요가 있다. 두 나라가 정부 차원을 넘어 국제기구 등 글로벌 층위에서의 관계, 동북아시아라는 지역적 수준의 소통, 시민사회 교류 등 다층적이고 복합적 관계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이를 통해 양국 관계에 영향력을 끼치는 민족주의의 부정적 측면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 이해를 돕는 책▼

▽국화와 칼(루스 베니딕트·을유문화사)=인류학자의 예리한 통찰력으로 일본문화를 분석한 일본학의 고전.

▽코코로(心)/마음(나쓰메 소세키·문예출판사)=‘일본의 셰익스피어’라 불리는 국민문학가 나쓰메 소세키의 대표작. 일본인의 마음(정체성)을 내밀하게 묘사.

▽근대일본사(데쓰오 나지타·역민사)=일본사 연구의 거장이 근대일본의 역사를 관료주의와 인간주의의 경합과 상호작용으로 서술.

▽한일관계의 정신사적 문제(이용희·신동아 1970년 8월호)=한일관계를 문명을 향한 ‘해바라기 현상’이란 측면에서 분석.

▽일본정치사상사연구(마루야마 마사오·통나무)=‘마루야마 천황’으로 불리는 일본의 대표적 지식인이 쓴 일본 정치 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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